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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7화 제네바행 대부대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떠날 날이 가까워오자 제 아버지는 옛날 딸 시집보내는 어머니보다 더 지순한 슬픔에 잠겨있었다. 술을 마시고 그는 아이처럼 울었다.



김정일 : 나 다 알아. 너희들 나한테서 정남이 떼 놓을려고 하는 거 나 다 알아



너희들이란 나, 혜림, 어머니를 말한다. 다 안다는 것은 정말 그가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삼 모녀가 언제한번 그를 거역한 일이 없지만 이 생활은 물거품이며 이 모순에 찬 생활에서 아이를 건져가지고 ‘떠나기만’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물은 진심이었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도 울었다.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슬픔을 내포하고 있었고 평탄치 못한 것을 감추고 있었으니...



모스크바, 제네바, 이렇게 행선지가 바뀌고 숙원이던 정남이 교육길이 열리고 있는 사이 제 엄마 혜림은 아무것도 모르고 모스크바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조마조마한 성취까지의 나날을 그에게 알리는 것은 치료에 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비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1년에 몇 차례나 혜림이 모스크바를 들락거리고 때로 홀아비처럼 정남이만 끼고 자면서도 아들이 있는 우리가 살던 집을 떠난 일이 없었다. 집을 비울 때는 ‘선생님 출장 가셨다’ ‘빠빠 출장갔어.’하고 우리 생활을 총 관리하던 편재의 과장에게 전화가 오고, 동시에 아들 정남에게 못 들어오는 사연을 알리곤 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다려 애태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화통에 울리는 그 목소리는 자애와 애처로움이 섞인 그런 다심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에게는 정남이 세 살 때 김일성이 정해준 여자가 있었고, 거의 10년을 두고 도굳을 드리며 김정일 비서를 사로잡으려하던, 끝내는 사로잡고만 떼버릴 수 없는 철봉리 여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해설: 김영숙과 애첩 고영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들 정남이가 있는 이 집을 와해시킬 궁리도 안했고 더 증축보수하고 호위중대 성원을 증강하고 있었다.



그가 외부에 전화 걸며 ‘우리집’이라 묘사하는 데가 여러 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내용적으로 떠나버린 혜림이를 그는 변함없이 아내로 대우하고 마음 깊은 곳에 정을 담고 있었다. 그와 혜림사이를 잇고 있는 금선은 믿음과 우애 같은 것이었다.



혜림이 순안비행장에 도착할 때, 떠날 때 김정일 비서는 아무리 ‘먼 곳’에 가 있었어도 비행장에 나가 맞이했고 바래다 주었다. 순안비행장 특별대기실 옆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가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곤 했다.



바로 그가 차를 세우곤 하던 순안비행장 그 지점, 아버지의 차가 검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되자 정남은 비행기 유리창에 얼굴을 돌린 채 울고 있었다. 그 애는 비행기가 몇 만 리를 갈 동안 섧게 섧게 눈물을 흘렸다. 어려도 영검하던 정남은 이렇게 ‘빠빠’와 영 떨어지고 만다는 어떤 예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1등실을 다 차지하고 그 뒤에 붙은 보조1등석까지 우리집 성원들로 메워졌다. 정일비서는 자기의 섭섭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머리수로, 든든한 머리수로 수행원을 늘렸다.



중앙당 부부장이 세 명, 녹화기까지 메고 다니던 사진기사, 영화기사, 운전사, 수행원이 사우디왕자행차 일행만큼 많았다. 여기서 대표단 ‘단장’은 정남이라고 제 아버지가 이름 붙여주었고 내적단장은 할머니라고 임명했다.



해설: 정남의 유학생활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리일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일남 :정남이의 유학을 위해 제네바 교외 레만 호숫가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별장 한 채가 준비됐다. 대지 2천5백평에 건평이 5백평쯤되는 단독주택이었다. 당시 2백만달러를 주고 샀다고 한다. 김정남 일행이 처음 제네바로 갈 때 20만달러를 김정일이 주었고 그 후로는 한 달에 평균 5만달러씩 경비를 쓰기로 허락받았다.



이것은 1980년 3월이었다.



“대장 동지, 선생님 전화입니다.”, 정남이 뛰어온다 “빠빠~”



제네바 별장에 도착하여 짐을 푼 때로부터 매일같이 정남에게 평양에서 전화가 왔다. 부자는 전화선을 통해 서로 울었다. 애가 새 생활에 빨리 적응하고 뜻을 붙여야겠는데 이 아버지의 전화는 정남이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해방시킬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정남이가 전화 받는 주위에 읍을 하고 서서 지도자 동지의 자애에 넘친 목소리가 몇 십만 리를 넘어오는 순간을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원 정상이 아니다. 이래가지고야 애를 어떻게 공부인들 시키겠니...”끝내 나에게만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도착보고와 입학수속, 계획승인 구실로 이철 국장을 불렀다. 이철이 평양에 나갈 때 정남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녹음해서 테이프를 ‘절대비밀’이라는 봉인봉투에 넣어 건네었다. 할머니는 이것이 ‘화단’일거라고 직감하시고 장과장과 토의했다. 장과장은 그 테이프를 들었다.



김정남: 빠빠 날 데려가라. 나 여기 싫어. 빨리 나를 데려가라. 빠빠, 나 빠빠없이 안살래...



울며 어린것이 녹음한 테이프를 장 과장도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과장은 눈이 새빨갛게 되어



“장과장: 할머니 안 되겠습니다. 이걸 ‘위’에서 들으시면 당장 ‘대장’을 데려갑니다...”하고 말렸다.



세 부부장이 합의하여 어쨌든 대장을 제네바 국제학교에 입학시켰다. 나의 딸 남옥이도 처음에는 정남이와 같은 반에 당분간 두기로 했다.



남조선 대사관 차 26번이 애들을 싣고 드나드는 국제학교는 그때 첨예하던 남북정세에서 언제 우리 애들을 걷어 싣고 사라질지 모르는 ‘안기부의 납치’ 가능성으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는 교실 뒤에 앉아서 아이를 지켰다. 열성 학부형들이 매일 두 세명은 있었지만 나처럼 빠짐없이 매일 ‘교수참관’하는 예는 없었다. 한 달이 지나자 담임선생 눈치가 보여서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은 아이만 교실에 들여보내고 자동차 안에서 괴뢰차 26번만 지켰다.



정문이 여럿이어서 한곳에 들어앉아서는 그것도 곤란했다. 그리고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동양 사람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데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을 구분할 수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차없이 와서도 얼마든지 ‘납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위태로운 사정이 정남이 아버지한테 반영되면 당장 데리고 나오라고 할 터이고 할머니와 나는 줄에 앉은 새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우리가 믿고 사는 이철 공사는 매일같이 새 정보를 들려주었는데 우리가 ‘적의 시야’에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철공사가 자신의 편의 때문에 그때 우리에게 과장해서 보고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제네바 꼴롱쥬, 그 좋은 빌라에서 애들을 국제학교에 넣는 행운을 따냈지만 할머니와 나는 좋기는커녕 피해망상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정남이의 상태는 9년간의 비정상적인 울타리 안 생활의 후과를 여실히 나타냈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말도 몰라서 그랬겠지만 아이들을 싫어했다. “대장동지 이랬습니까, 대장동지 저랬습니까. 예 예”하는 떠받드는 어른들만 보아오던 정남이는 전혀 위해주지 않는 애들, 놀아주지 않고 못 본 척 저희끼리 노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려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 종이 나면 애들은 다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교실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그림만 그렸다. 그 애가 그리는 것은 평양 만화에서 본 ‘미국놈 대가리’였다...



정남의 유학을 위한 대부대는 결국 2년 만에 철수하고 말았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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