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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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화 하왕십리 46번지 등나무집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8




나는 1935년 서울 계동이라는 이른바 고전적 주택가에서 태어났다. 두 살 위인 오빠 일기가 있었고 나와 연년생으로 동생 혜림이가 태어났다. 나는 생일이 섣달 스무날인데 이것은 음력이었고 양력은 모른다. 이날은 어머니 생일날이었다. 계집애를 낳았다고 하니 좀 실망 한 듯 아버지가 곧 대문을 열고 나갔다고 한다. 우리 집은 아들이 귀한 집이었다. 아마 두셋 줄줄이 아들만 태어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종가의 3대독자였다.



60년이 지나서 내가 머리가 하얗게 늙어 버렸을 때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그날 아버지가 길 건너 문씨네 집에 가서 딸을 낳았다고 하니 그 집 영감이 곧 나의 생시를 가지고 점을 쳐주었는데 애가 아주 재주 있겠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딸이라도 괜찮다고 기뻐하더란다. 나의 외할머니는 정식으로 점쟁이한테 가서 나의 사주팔자를 점쳐 보았는데 돌아와 어머니를 꾹 찌르시며 누가 들을세라 수군수군 열두 번 시집가서 열두 번 과부되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하더란다. 어머니는 평생 처음 이 말을 입 밖에 옮긴다고 하시며 서글프게 웃으셨다. 88세 어머니 돌아가시던 해였다. 나는 계동집에서 다섯 살까지 살았다.



외할머니, 유모, 외갓집 식구들 모일 때면



“얘는 누굴 닮아 이렇게 못생겼을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애야”



하며 나를 놀렸다. 그러면 나는 다락에 올라가 몰래 울곤 했다. 아무도 없을 때 안방에 있는 어머니 거울 앞에 앉아 내 얼굴을 찬찬히 본 기억이 난다. 오빠는 제 코를 손가락으로 밀어올리고는 빨딱코, 들창코라고 놀렸다. 나는 코를 꼭 쥐여 당기고 거울 앞에 한참씩 앉아 있었다. 이랬으면 안 밉겠는데…이것이 다섯 살도 되기 전부터 형성된 나의 열등감이었다.



엄마는 여간해서 오빠를 야단치지 않았다.



“네가 자꾸 앙앙하니까 그렇지. 못들은 척 해라. 혜림이는 가만있으니까 어디 건드리던…”



나는 오빠를 헐뜯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적 인습, 가부장제의 철칙은 아들이 제일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에서는 오빠가 기둥이었다. 죽데기였어도 4대독자 종손은 떠받들려 자랐겠지만 잘생기고 건강하고 성격 좋은 몽이오빠는 아버지 어머니 인생의 첫 번째 성공이었으며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보배였다. 아마 오빠가 나를 잘못 때려 곱사등이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연년생으로 혜림이가 태어났기 때문인지. 계동 살 때 외할머니는 집에 오셨다가는 치마 귀에 나를 싸 업고 씨영씨영 계동고개를 넘어 외갓집 가회동으로 데리고 가시곤 했다. 왕십리로 이사할 때 나는 외갓집에 가있었다. 왕십리가 어딘지 먼데로 이사를 했다고 해서 나도 가보고 싶어 졸랐다. 밖이 어두웠는데 외숙모가 할 수 없이 나를 업고 왕십리 이사 간 집으로 데리고 떠난 기억이 난다.



불빛이 휘황한 밤거리에 전차를 갈아타고 그때는 몰랐지만 황금정 6정목까지 왔다. 거기서 작은 전차를 또 갈아탔는데 검은 하늘에 별이 보이는 무연한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전차 안의 사람들은 촌사람 같고 전차도 구식이고 운전사 발밑에서는 냉냉-하는 쇠경종이 울렸다. 전차에서 내려서도 한참이나 촌길을 가다다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 덩실한 집 앞에 들어섰다. 마당에 전깃불이 비치고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이 우중우중 널려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송아지만한 누런 개가 몸을 구불텅거리고 꼬리를 저으며 다가와 나의 발을 핥았다. …내가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자 오빠가 그 개의 임자인 듯 “도꾸, 도꾸.” 부르며 모가지를 부여안고 등을 쓸어주며 으스댔다.



“안 물어. 요 바보야”



별이 박힌 넓고 넓은 밤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머리위에 있었고 전깃불이 매달린 높은 덕대에는 보라색 포도송이 같은 등꽃이 만발해 있었다. 귀를 납작하게 붙이고 꼬리를 젖고 설렁이는 잘생긴 커다란 서양개의 출현, 더 크고 장해보이는 오빠의 ‘전횡’, 이것은 몇십 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는 그 밤 등나무집의 첫인상이었다. 이 집이 하왕십리 46번지. 등나무집이다.



우리가 간 집은 진흙에 볏짚을 섞은 토담으로 벽을 세우고 지붕은 검은 함석을 눌러쓴 바라크집이었다. 우리 집주인은 오미야라는 일본 농군이었다. 우리집은 오미야가 자기 구상으로 손수지은 집이고 마당과 꽃밭도 자기 식으로 꾸민 일본농가의 풍이 있었다.



응접실로 쓰는 넓은 다다미방이 두 개 있었고 거기에서 마루를 거쳐 온돌방이 2개 나란히 있었다. 모든 방은 남향이고 방마다 마당으로 나설 수 있는 미닫이가 있었다. 목욕탕은 마당에 있었는데 겨울이면 방에다 함지를 들여놓고 어머니가 목욕을 시켜 주는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앞마당 넓은 꽃밭 뒤에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 얼마나 가지가 큰지 거기에는 어른도 쌍그네를 탈 수 있는 그네가 매어 있었다. 시커먼 그늘을 넓게 깔아주던 두 그루의 밤나무에서는 해마다 탐스런 알밤이 몇 말이나 나왔다. 꽃밭과 넓은 부지 여기저기는 넌늠돌을 깐 오솔길이 있었고 그 옆에는 석탑 석등이 있어 일본정원 냄새를 풍겼다. 우리 삼남매에게는 하루 종일 뛰어놀아도 다 놀 수 없는 공간이었다.



왕십리는 우리 삼남매의 잊을 수없는 추억의 고장이다. 우리 집 뒤에 흘러내린 야산의 정점인 듯 높은 둔덕이 있었고 거기에 덩실하게 지금 생각하면 원폭 뭉게구름 같은 위풍 있는 등나무가 있었다. 그 언덕을 의지하고 반토굴에 기와공장이 있었다. 기와공장에서 쓰는 시새동산이 호두나무 아래 펼쳐졌는데 거기는 우리 놀이터였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우.”



손을 밀어넣고 혜림이와 종일 두드리던… 시새동산. 거기서부터는 우리의 이웃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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