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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28 - 아동 인권 : 꽃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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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7-09-25 18:19


<시즌2> 라지오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눈물의 기록, 정의의 기록'
증언28 - 아동 인권 : 꽃제비

북한에서 부모가 없거나 있다 해도 돌봐줄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을 꽃제비라고 부릅니다. 꽃제비들은 역전이나 장마당에서 음식을 구걸하며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겨울에는 살인적 추위를 피하지 못해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일도 꽃제비들에겐 그리 놀랄일이 아닌데요. 북한 아동 인권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름, ‘꽃제비’ 오늘 그 인권 실상에 대한 이야기 들어봅니다.

1. 오늘 증언해 주실 지철호씨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2006년에 탈북했고 2007년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_그럼 시간이 좀 지났네요. 거의 십년 넘는 시간이 지났군요. 현재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지금 나이는 서른 세 살입니다. 스무 살 조금 넘어서 탈북했습니다. 

2. 오늘 북한의 꽃제비에 관해 증언하러 나와주셨는데요, 북한 청취자분들은 다 아시지만 남한에서는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수도 있을 것 같아요. 꽃제비가 무슨 뜻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그 유래가, 북한에서는 우리나라(북한)이 살기 좋기 때문에 거지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1990년대 러시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북한에 돌아와, 길거리에 이렇게 입지도 못하고 먹지 못해서 떠돌이 생활하는 애들을 보고 러시아말 '고츠제비'라고 말하고 여기에서 꽃제비가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3. 북한에 있었을 때 가정 형편은 어떠셨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명절 빼고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어요. 요즘 흔히 독재체제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가장 정치하기 쉬운 방식이 적당히 먹여서 배고픈 생각만 일차적으로 하게 만들어, 정치적·문화적 황색바람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옥수수밥 배불리 먹는 것이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었어요. 제가 12살 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매우 힘들었습니다. 학포탄광 노동갱도에 계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백년터라고 박달냉이에 있는 흙도 먹어봤고 두부콩깍지, 송치가루, 고사리가루, 누에가 먹는 뽕나무잎까지 먹었습니다. 

_그걸 먹고도 괜찮나요?

그게 뽕나무 잎을 당에서 먹으라고 해서 먹었는데, 그걸 먹으면 입에 거품이 생겨요. 배탈도 나고, 몸안에 얼마 남지 않은 지방까지 배설돼 사람들은 더 힘들어지고요. 그땐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4. 열두 살 당시 북한에 대기근이 시작됐다고 그러셨어요. 1990년대 말인데요. 학교를 다니셨을 텐데 학교를 계속 나갈 수 있었나요? 

저는 학교를 거의 못 다녔습니다. 일단 배고프니까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집중이 안 되다보니 너무 힘들었고요. 당시 음악 강사를 하던 분이 아사로 돌아가시는걸 보니 굳이 학교를 가야되나 하는 생각이 더욱 들었죠. 그 때 당시 선생님들도 가르쳐야하는데 배고프니까 애들한테 복습을 시키거나 아니면 오후에 호미를 들고 선생님 밭에서(개인 텃밭) 강제 노동을 시켰어요. 그래서 안 간적도 많죠. 그런데 유별나게 잡으러 오더라고요. 또 잡으러 오면 학생들이 와요. 1차, 2차는 학생들이 오고 3차부터 선생님이 와요. 근데 애들이 올 때는 잡혀가요. 그래도 선생님들은 (학생이) 배고파서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는 가마를 열어봐요. 가마가 비어있는걸 보고 그냥 가시는 거죠.

_차마 배가고파서 아예 학교를 갈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군요. 

그 때 당시에는 걸을 힘도 없었습니다.      

5. 당시 걸을 힘도 없어서 학교에 갈 수 없을 때에는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고 지냈나요?

일단은 북한은 'ㄹ'자 들어간 게 제일 중요한 거죠. 예를 들어서 알, 물, 불.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하루 일과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남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느냐, 굴복하고 죽느냐. 굴복하면 아사자로 남는 거죠. 그때 당시 농촌에는 '졸배'라는 풀이 많았고 쑥이나 새투리가 많았습니다. 

_새투리는 어떤건가요?

토끼가 먹는 풀인데 새투리가 대단히 씁니다. 젖 같은 것도 나오는 풀인데 그것을 우려서, 새투리가 99퍼센트에 옥수수 가루를 한 숟가락 넣고 먹곤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먹다보니까 사람들이 기력이 없어 길에 누워있는 사람도 있고, 누워서 못 일어나는 사람도 있죠. 밭에서는 서있을 힘이 없어서 풀을 엉금엉금 기어서 벤다음 배낭에 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_그런 꽃제비 생활을 한 기간이 몇 살부터 몇 살까지였나요?

저는 나올 때까지 꽃제비였습니다. 지금 북한이 95년도부터 고난의 행군 시작해서 20년이 흘렀죠. 하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민들의 삶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요. 저도 스물두살까지 낮에는 직장생활하고 밤에는 석탄을 훔치거나 식량을 훔쳐야만 하는 부서(직장)이다 보니까, 말 그대로 저는 아동 꽃제비에서 성인 꽃제비까지로 살다가 나온 격이 되는 것 같습니다. 
 
_그러면 열 살 조금 넘어서부터 시작된 꽃제비 시절이 스무 살 넘어서까지 계속된 것이군요. 꽃제비 생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석탄과 옥수수를 어디가서 구할까' 이런 고민만 한 것이군요.

네, 저는 역전에서 살았습니다. 왜냐면 역전에서 식량이 내려오거나 석탄이 내려오면 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호송원이 가기 전에 내가 먼저 훔쳐야했습니다. 그 외 제가 본 다른 꽃제비들의 삶이라면, 제가 석탄을 훔쳐서 회령시에 팔러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회령역 옆에 오산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루에 보통 7명 적어서 5명 까지 굶어죽는 것을 봤습니다. 역사 안에서만 말이죠. 역사 밖 기차 주변에는 굶어 죽는 애들도 많았습니다.

_그 친구들은 어떻게 하나요?

그 친구들을 구르마에 실어서 가마니를 덮어 직파하는 거죠. 직파라는 것은 관이 없이 그냥 묻는 거죠. 한번은 회령역에 석탄을 팔고나서 식량을 사러 갔는데 한 아이가 울고 있더라고요. 키가 90cm 정도 되는 친구인데 온몸이 파랗게 다 부었더라고요.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말하길, 이 친구가 파상풍에 걸렸는데 1~2시간 뒤에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 돈을 털어서 죽기 전에 맛있는 것을 먹으라고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6. 뭔가를 훔쳐서 먹을거리를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이군요. 잠은 어떻게 자나요? 

저는 잠을 집에서는 거의 안 잤어요. 왜냐면 밖에 나가야 정보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름에는 비를 피해야했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야했는데, 지금도 추우면 탄광 보일러방에서 자던 시절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탄광에는 탄부들이 샤워를 하기 때문에 목욕탕에서 물을 끓입니다. 물을 끓이면 재가 나오는데 그 재가 보통 1.5톤짜리 차의 절반 내지 한 개정도 차는데 이것이 처음 나왔을 때 빨간 불덩어리입니다. 그 위에 마대를 깔고 자거나 했습니다.

_그러면 여름에는 추위도 피할 필요가 없을텐데 어디서 잤나요?  

여름에는 덥고 비가 올 확률이 많기 때문에 기중기 밑에서 많이 잤습니다. 저희가 살던 동네, 석탄 직장에 기중기가 있었습니다. 그 밑에서 잠을 자다가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 22호에서 석탄이나 식량이 내려오면 그걸 또 훔쳤습니다. 성공하면 집에 가고 실패하면 기중기 밑에서 다시 자고 그랬습니다. 

_기중기 밑이면 위험하진 않나요?

밤에 갑자기 기중기가 이동하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또 먼지가 나서 석탄가루가 기중기 밑으로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위험했습니다.

7. 꽃제비 생활을 할 때 부모님이 살아 계셨죠? 부모님은 이런 생활을 보며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부모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집안에 도움이 되는 것을 좋아하셨죠. 일단 정상적인 국가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예요. 부모님 힘으로 자식을 키울 수 없고 본인들이 굶어 죽을 상황이다보니, 자식이라도 이렇게 (스스로) 살아내고 집에다 식량이나 석탄을 가져오는 것을 반기는 분위기였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_그럼 먹는 것도 집에 와서 가족들과 같이 먹는 경우가 많은가요? 아니면 밖에서 구해지면 어떻게 해서든 바로 먹는 경우가 많은가요.

일단은 식량 같은 경우 옥수수나 두부콩 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생으로 먹지 못하다보니까, 예를 들어 성적이 좋을 때는 집에 가져가서 절구에 찧어서 죽 써먹었습니다. 옥수수를 훔쳤는데 한줌 정도면 그냥 씹어 먹기도 했고요.

8. 옷은 어떻게 입었는지 궁금해요. 먹는 게 해결이 안됐으니까 옷도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계절이 바뀌면 특히 겨울에는 어떻게 옷을 구하고 입었는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나선 옷을 입는다고 해도 중국에서(온 옷이)나 중고 옷을 사 입고 아니면 버리는 옷을 주워서 입는데, 북한은 너무 추워서 동화나 동복이 없으면 살 수가 없거든요. 누가 입던 동복을 다시 기워서 입거나 동화의 경우 아예 없으니까, 북한에서는 군인들이 신는 신발이나 강산에서 신는 신발은 다 천으로 돼있거든요. 거기에 동복 헝겊을 다시 기워서 좀 두껍게 해 겨울을 났습니다.

9. 그런데 꽃제비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수용시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곳은 안 가보셨나요? 

저는 그런 시설에는 가보지 않았는데 먹을 것이 없다보니까 직결소에는 갔었습니다. 그때 성인들과  아이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직결소랑 927상무. 927상무는, 9월27일 김정은이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꽃제비들을 수용하라 국가의 망신이다.’ 이런 식의 얘기가 오간 것으로 알고 있고 이 방침으로 927상무가 있었는데 여기를 (저희는) 구제소라고 불렀습니다. 구제소에 있는 아동들을 봤었죠. 

그런데 (그곳) 아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 끼에 죽지밥 한 줌씩 주고 소금을 넣은 맹물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보름 전에 제가 아는 지인으로부터 북한 소식을 받았는데 여전히 꽃제비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과거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김정은이 북한 아동인권에 문제가 없다고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서 일단 애육원이나 육아원을 많이 건설해가지고 그 속에서 애들이 잡혀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_묵지밥이라는 건 어떤건가요?

묵지밥은 옥수수를 기계에 넣으면 가루가 나오고 쌀보다 더 작은 강냉이 눈이 많이 섞인, 그런 더 작은 가루가나오는데 그것을 묵지라고 합니다.  

8. 북한 동포들이 이 방송을 듣게 될 텐데요. 그들에게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제가 며칠 전에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에 갔던 이유는 제가 경험한 꽃제비를 재연한 재연극을 보러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재연극을 하면서 함께 출연했던 출연자가 말하길, '사람 사는 게 무엇인지 몰랐는데 나오고 나니까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구나 알게 됐다.'하더라고요. 북한주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시 만날 때까지 모든 분들이 살아계셨으면 좋겠고, 오늘도 삶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한국과 다른 민주주의 국가 주민들처럼 문화와 정치, 그  외 자신의 오락도 즐길 수 있는 주민들이 될 때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계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진행 : 북한의 유랑 걸식 아동, 꽃제비에 관해 지철호씨의 증언 들어봤습니다. 오늘 증언 감사합니다.

- 2부 -

북한의 꽃제비는 북한 아동 인권의 실상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이에 관한 인권법적 측면을 전문가를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정현 교수 전화연결돼 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지철호씨의 오늘 증언을 통해, 북한 꽃제비에 관한 어떤 인권법적 문제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요?

일단 오늘 증언은 증언자도 말했듯이 대부분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의 얘기였습니다. 요즘은 다행히도 이런 꽃제비가 과거와 같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우선 배급제가 붕괴된 북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계층인 부녀자와 어린이가 가장 큰 피해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 민주국가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 즉 식량권, 주거권, 건강권 등의 기본적 사회권은 국가가 더욱 적극적으로 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관련 교육 및 훈련을 실시하며 필요하면 열악한 사람들에게는 직접 식량과 주택을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하물며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식량이나 주택, 교육, 의료 서비스 등이 모두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준다고 선전들을 하고 있는데요, 북한과 같이 이런 사회 기반이 갑자기 무너지면 자체 해결능력이 없는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힘과 능력이 많이 부족한 어린 아동들은 정말 사지에 몰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안은 다양한 사회권의 침해 사안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으면서도, 꽃제비의 경우엔 특히 특별한 보호 및 지원을 받아야 하는 아동 권리의 다양한 침해 사안으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북한은 위에 말씀드린 여러 사회권 및 아동권을 규정하고 있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및 아동권리협약의 당사국입니다. 즉, 북한은 꽃제비 문제 등 많은 사회권 문제에서 자신의 국제적 의무 이행에 실패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북한의 유랑 걸식 아동, 꽃제비들이 겪는 인권침해 문제를 살펴봤습니다. 조정현 교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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