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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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서른 네 번째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6-22 17:35


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속으로 혁명가요를 목청껏 불렀다. 그들은 불쑥불쑥 조선 말로 말을 걸어 보내면서 내 표정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들이 꽤 많은 말을 걸었지만 나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다나니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 방법은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래를 부르면 그들이 나에게 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데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는 내 귀에 잘 들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대화중에 내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내용은 정말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였다. 바로 두 남자가 음식투정을 하는 내용이었다.



“어제부터 밥은 못 먹고 라면과 과일 단물로 때웠더니 이거 미치겠는데...”



그가 불평을 늘어놓자 다른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정말이야. 창고에 라면이랑 단물 뿐이더라구. 이렇게 늦어질 줄 몰랐는데 자꾸 연기되는 바람에 음식이 상할까봐 모두 버렸대. 아휴, 나도 이제 라면은 더 이상 못 먹겠어.”



‘저 자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 귀한 라면과 과일 단물을 싫어다하니.....’



라면과 과일 단물은 북에서는 구경초자 하기 어려울 최고급 식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만 먹는다고 불평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북에서 라면은 ‘꼬부랑 국수’라 하여 1970년대 중반에 제일교포가 조국에 헌납한 공장에서 생산해 내는 것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내가 자본주의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나라 라면을 보고 나니 북조선의 꼬부랑국수는 그저 라면 흉내를 내었을 뿐임을 알았다. 북녘의 라면엔 양념봉지도 들어있지 않아서 직접 간과 양념을 만들어 넣어야 했다.



‘남조선의 라면도 수준이 낮아서 저토록 불평을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여튼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뒤 비행기 안이 약간 어수선해지고 바빠졌다. 어느 남자가 “서울에 거의 다 왔어요” 하고 알려주었다. 그 소리도 못들은 척 해버렸지만 서울이라는 소리가 귀에 들어 왔을 때 나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랐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 같고 다시금 눈물이 쏟아졌다. 평양에서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제일 먼저 눈앞에 떠올랐다. 꼭 한 번만 더 집에 들러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했어도 이처럼 가슴에 걸리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들의 작별은 너무나 미진했었다.



외할머니가 나에게 갖는 정은 각별했다. 할머니가 40대에 처음 본 손녀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특별한 듯했다. 나도 외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그 외할머니가 1987년 8월 말쯤 나를 보기 위해 개성에서 평양까지 오셨다. 노령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무리해서 오신 것이다. 나는 지도원에게 애원하다시피 하여 하룻밤 외박을 허락받고 집으로 달려갔다. 외할머니와의 15년만의 재상봉은 정말 감격적이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오래 살다보니 널 다시 만나는구나. 병들어 누워 있으니 네 얼굴이 눈앞에 오락가락하고 보고 싶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내 이렇게 왔다.”



외할머니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셨다. 나 역시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에 행복한 마음이 되어 콧물을 훌쩍였다. 그날 저녁은 잔칫집같이 들떠 있었다. 아버지는 앙골라에 나가 계셨기 때문에 그날 안계셨지만 우리는 경단도 빚고 외할머니가 만드시는 신선로도 옆에서 거들었다. 할머니는 이 외손녀를 위해 특별히 개성 특식인 신선로를 손수 만들겠다고 하셨다. 몇 달 전 시집간 동생 현옥이도 일찍 퇴근하여 일을 거드느라 부산을 떨었다. 어머니도 모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음식을 차렸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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