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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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5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김정일은 남조선이 세계적인 행사를 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또 질투했다.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남조선 비행기에 대한 폭탄테로 사건을 벌린 일이나, 서울 올림픽을 릉가하겠다며 제13차 청년학생축전을 벌린 일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남조선에 대한 김정일의 렬등감은 북조선의 경제를 무너뜨렸고 국제적인 테로국가라는 오명을 씌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같은 결과에서도 교훈을 찾지 못한 김정일은 2002년 남조선이 세계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자 서해 앞바다에서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추적, 사건과 진실, 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43조’는 1999년 5월말 이른바 ‘서해전선 사업’을 제의서로 작성해 김정일의 서기실에 제출했습니다. 제의서를 본 김정일은 몹시 기뻐하며 거듭 칭찬을 했습니다.



김정일 : 43조 성원들이 아주 귀중한 발견을 했습니다. 서해전선 사업이야말로 남조선의 북침도발을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전술안이며, 놈들을 우리의 선군정치로 단단히 구속시킬 수 있는 현 시대의 가장 주동적인 명안입니다.



모두 : 경애하신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 덕분입니다.



김정일 : 서해전선 사업을 하루도 지체하지 말고 즉각 추진하시오.



김정일의 비준을 받은 ‘43조’는 바다 우에 새로운 전선을 만들어내기 위한 치밀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43조는 ‘서해전선 사업’을 1회적인 대결 사업이 아닌 북남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명분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분쟁이 발생할 경우 북남관계의 쟁점이 될 것이고 이 문제를 풀기위해 남조선이 어떻게든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43조는 서해해상경계선이 북남관계의 핵심쟁점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단계적으로 수위를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장, 단기 계획안을 수립했습니다. 계획안이 완성되자 43조는 이 전술안을 집행할 인민무력부 작전국을 찾았습니다. 무력부 작전국과의 론의를 통해 서해에서 전선을 형성할 구체적인 위치와 날짜, 작전방법과 동원할 부대 등 세부적인 문제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준비 끝에 제1차 서해교전의 날짜가 6월15일로 정해졌습니다. 6월을 선택한 것은 이 시기가 꽃게잡이 철이라 어업권을 주장하며 서해해상을 자신들의 령해로 주장하기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조선의 어민들이 해상경계선을 넘어서 꽃게를 잡다가 남조선 해군들에게 체포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랍치’를 주장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어민보호를 핑계로 북조선 해군들이 무력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6월은 여러모로 적기였습니다. 실제로 43조는 북조선 어민들이 남조선 해군에 랍치되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수립했으며 작전을 실행할 때 어선들을 앞세웠습니다.



다만 43조는 서해교전의 목적이 북조선 주민들에게 남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북남경협사업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김대중 정부를 협박해 북남관계에서 주도권을 쥐는 것이 이였기 때문에 몇 발의 총격으로 긴장을 조성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든 검토를 마친 43조는 김정일에게 서해교전 작전계획을 제의서로 올렸고 김정일은 6월12일에 비준을 주었습니다. 전투작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43조 성원들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리명수 대장, 김윤심 해군사령부 사령관만이 다가올 전투 준비로 여념이 없었습니다.



한편 해군사령부 김윤심 사령관은 작전 날짜를 곱씹으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김윤심은 서해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다 해군사령관으로 승진한 인물로 서해 바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김윤심은 김정일을 수행해 각종 공연에 참가하는 최측근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김윤심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99년 1차 서해교전 뿐만 아니라 2002년 2차 서해교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김윤심의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김윤심 : 여보세요.



교환수 :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김윤심 : 아니 장군님이 집으로 전화를.... 큼큼



김정일 : 납니다.



김윤심 : 최고사령관 동지, 김윤심 전화받습니다.



김정일 : 어떻습니까? 작전준비가 잘 되여 갑니까?



김윤심 : 한치의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김정일 : 내가 아주 관심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김윤심 동무!



김윤심 : 네, 장군님!



김정일 : 이번에 해군에서 영웅이 몇 명 배출돼야 하겠습니다.



김윤심 : 네, 장군님, 우리 해군사령부는 위대한 장군님의 어뢰알이 되겠습니다.



아무리 측근이지만 김정일이 집으로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김정일은 ‘서해전선 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전화를 받고 한껏 고무된 김윤심은 열의에 불탔습니다. 그는 남조선에 ‘어뢰알의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에 들어갔습니다. 6월13일 남포시에 있는 서해함대사령부에 김윤심이 나타났습니다. 서해함대 사령관을 지내 각 경비정과 함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윤심은 작전에 참가할 지휘관을 직접 뽑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김윤심은 서해함대 지휘관들에게 자신이 내려온 목적을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용기 있고 패기 있는 젊은 함장들을 불러 모아 전투에 참가시킬 지휘관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한자리에 모인 젊은 함장들은 접견의 리유도 모른 채 자신들의 충성심을 목소리 높여 웨쳤습니다. 김윤심은 알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며 서해함대 사령부를 떠나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서해교전 작전을 하루 앞둔 6월14일, 서해함대 사령부에 고급 승용차가 나타났습니다. 서해함대 지휘관들은 그들의 출현에 깜짝 놀랐습니다. 3호청사의 핵심간부와 당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성원들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김윤심이 접견했던 젊은 함장 몇몇을 지목해 접견실로 불러냈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다섯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신동아. 2002.08

- <“연평해전·서해교전은 김정일 ‘평화협박 전술’ 지시받은 3호청사·인민무력부·해군사령부 합동작품”> 신동아. 2006. 07

- <박정성 전 해군 2함대사령관의 연평해전 비화> 신동아. 2008-06-25

- [긴박했던 교전상황] '돌아가라' 접근하자 北 기습. 조선일보. 2002.06.29

- [서해도발 교전상황] 쏘지않고 밀어내려다 당했다. 조선일보. 2002-06-30

- 서해교전 비화…北 수뇌부의 치밀한 계획. 조선일보. 2007-06-28

- [기고]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김홍렬·前해군참모총장 2008-06-27

- 고 윤영하, 한상국, 조천형 … 6년만에 마침내 영웅이 되다. 중앙일보. 2008.06.30

- LG 주간경제, 200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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