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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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쓰레기
남조선 생활기
작성날짜
2012-04-19 17:28
봄이 왔다. 차창으로 비껴드는 따스한 해살은 흐리멍텅한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든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아침공기도 한껏 들이키니 그야말로 환상이다.
효과; 호~ 르레 찌쫑~ (새 소리)
정임; 우와~ 공기 좋다.
엊그제까지 돌던 차가운 기운은 온데 간 데 없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으니 이런 날엔 무슨 일이든 발동만 걸리면 해내기 딱 좋다. 겨우내 꽁꽁 닫아두었던 창문을 열어제끼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커다란 창문 유리까지 청소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베란다를 청소하고 있는데 당반(선반) 우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올라가 있어서 너무 지저분했다.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 쌓인 물건들을 몽땅 내렸다. 별것들이 다 있었다. 언젠가 퇴근하다가 아파트 앞에서 주어 들여온 까까오통(스트로품 상자)이랑 지함도 십여 개는 잘 되었다. 꼭 쓸데가 있을 것 같아 주워 들여왔는데 쓸 일이 별루 없었다. 저번에 회사 직원이 이사할 때 가 보니 지함같은 건 몇 개면 충분했다. 다 버려야 할 것 같다. 쓰레기를 항목별로 분류하다가 문득 방 구석에 솜이 다 잦아먹은 방석 두 개가 눈에 띈다.
초겨울에 샀는데 눅은 것으로 샀더니 벌써 솜이 다 잦아들어 납작하게 돼버렸다. 산 지 얼마 안돼서 버리긴 아까웠지만 이번 참에 버리기로 맘 먹었다.
정임; 오늘은 다른 쓰레기는 못 버리는 날이니까, 방석만 버려야겠네,
여긴 쓰레기 버리는 날이 따로 있다. 동 마다 정해진 날짜에 쓰레기를 처리한다. 우리 동은 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아침까지이다. 그러나 낡은 옷가지 같은 고포류는 따로 함통이 있으니 아무 때나 버려도 된다.
나는 방석 두 개만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이대로 산책을 가고 싶을 정도였다. 산들 산들 부는 봄바람을 한껏 만끽하면서 천천히 옷 수거함 앞으로 다가갔다. 방석을 들고 수거함 구멍에 손을 뻗다가 나도 모르게 잠시 주춤했다. 정작 버리려고 하니 아까웠기 때문이다. 방석 하나는 솜이 덜 죽어 있어서 한해 겨울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조털로 된 겉 씌우개는 보들보들하기까지 했다. 선뜻 버리지 못하고 이리 저리 뒤집어 보면서 혹시 다른 데 쓸데가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궁상을 떨고 있단 생각에 ‘에라~’. 대담하게 버렸다. 이 풍족한 남조선 땅에서 뭐가 그리 아쉽고 아까울 게 있을까,
방석이 쓩~ 함통에 들어가는 순간, ‘아!’, 너무 아까웠다. ‘왜 버렸지?! 속에 있는 솜을 버려도 겉 씌우개는 비록 인조털이긴 하지만 다른 데 쓸데 있지 않을까?’
나는 남은 방석 한 개를 쥐고 이리 저리 미적거리다가 끝내 버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섰다. 정작 그대로 돌아서려니 먼저 수거함통에 처넣은 좀 나은 방석 생각에 가슴이 다 알찌근했다.
‘이런~ 하필 좋은 게 먼저 손에 잡힐 게 뭐람, 에익!~’
집으로 올라온 나는 방석 겉 씌우개를 분리해서 책상 다리 받침대를 만들었다. 책상 다리에 눌려 방바닥이 움푹 패일까 늘 신경 쓰였는데 받침대를 해놓으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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