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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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 2

북한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30 22:17


사회 : 이번 순서는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시간입니다. 김정일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간부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학생들과 함께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방도를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부터 개혁개방 이후 변화한 중국 사회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중국의 기념일과 려행문화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지난 2008년에 북경에서 있었던 개혁개방 30돐 기념 사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중국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도움 말씀을 위해 윤성호 방송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윤 : 네, 안녕하십니까?



사회 :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벌써 30년이 되었습니다. 보통 농업개혁을 시작했던 1978년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해라고 보면 지난 2008년이 개혁개방 30돐이 됩니다. 당시는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했던 해이기도 합니다만, 올림픽과 함께 북경에서는 개혁개방 30돐을 기념하는 사진전도 같이 열렸다면서요?



그렇습니다. 3년 전이었던 지난 2008년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30돐이 되던 해였습니다. 당시 중국 북경에서는 개혁개방 30돐을 기념하는 거리 사진전이 있었습니다.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북경 왕부정(중국말로 왕푸징)이라는 곳에서 열렸는데요. '민생기억 30년', '도시기억 30년', '가정기억 30년'이라는 주제로 전체 800여 점의 기념사진들이 전시되었습니다.



북경의 12월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기온이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북경 인민들이 거리 사진전을 관람하며 개혁개방 30돐을 기념했습니다. 수많은 북경 인민들은 전시된 사진을 꼼꼼하게 구경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사진에 담긴 과거를 떠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당시 거리 사진전에 전시된 사진 가운데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변화를 잘 담고 있는 사진 몇 장을 골라 이야기 나누면서 중국 개혁개방이 중국 사회에 남긴 사회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사회 : 때론 사진 한 장이 력사적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변화를 이런 사진 만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도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럼 첫 번째로 소개해주실 사진은 어떤 겁니까?



첫 번째 소개할 사진은 ‘제1세대 녀성직공 옹순현의 성공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사진입니다.



옹순현은 1981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기 위해 선전 경제특구를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 길거리 게시판에 붙은 직공모집 선전판을 보게 됩니다. 홍콩장난감공장에서 직공을 모집한다는 광고였습니다. 당시는 개혁개방이 막 시작되던 초기였습니다. 각 공장기업소들은 새로운 운영방식에 따라 기업소나 공장을 운영했었는데요. 중국에서는 이 시기에 직공이 된 녀성들을 가리켜 제1세대 녀성 직공이라고 합니다.



옹순현은 광고를 보고 홍콩장난감공장으로 찾아가 지원서를 냈습니다. 당시에는 구직난이 심해서 120명을 뽑는 장난감공장에 무려 천명이나 되는 지원자가 몰렸다고 합니다. 공장에서는 지원자가 많이 몰리자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사탕 하나를 여러 개로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대로 쓰라는 식으로 지원자의 지식수준과 창조적 사고능력을 평가하는 문제들이 나왔는데요. 옹순현은 이 시험에 합격해 제1세대 여직공이 됐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대학졸업장이 없는 시골출신 여학생이 도시 직장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모가 연줄을 대서 직장에 넣어주거나 아니면 가난한 시골의 농촌생산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사회 : 당시는 직업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을 텐데, 자신의 힘으로 도시에 있는 기업소에 들어갔으니, 부모님이나 일가친척들이 모두 기뻐했겠군요.



부모님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친구들은 다들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동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옹순현의 오빠는 기업소에 가려는 그녀를 말렸다고 합니다. “홍콩장난감 기업호는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가까우니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오빠가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그녀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번 가보고 문제가 있으면 다시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말로 오빠를 설득해 결국 선전으로 갔습니다. 그녀가 선전에 도착한 것은 1982년 4월 30일이었습니다.



사회 :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 단계다 보니 어려운 점도 많았을 것이고, 또 어린 녀학생이 도시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120명이었던 직원들 중에서 50명 정도는 도시에서의 외롭고 고단한 생활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채 석 달을 못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옹순현은 고단함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남아 일했습니다. 표준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얼마 되지 않아 생산조 조장이 되었습니다. 5년 후인 1987년에는 지금의 남편과 3년 동안의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도 했습니다.



회사에서 림시로 빌려준 작은 집에서 살던 옹순현은 1987년 결혼을 하면서 남편과 함께 아빠트를 샀습니다. 부부는 63㎡ 크기의 아빠트를 사서 세탁기, 천연색텔레비죤, 랭장고를 들여놓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말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입니다. 당시 옹순현의 한 달 월급은 인민비로 700원 정도였는데요. 남편의 월급까지 합하면 매달 1100원 정도를 벌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매달 1100원이면 소득이 높은 가정에 속했기 때문에 그럴듯한 집과 살림을 장만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회 : 가난한 시골 농부의 딸이 도시 기업소에 들어가 열심히 일해 스스로의 힘으로 집과 살림살이를 마련해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군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90년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때 그동안 일 해온 장난감공장을 떠나 유리공장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직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으려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본 옹순현은 전문대학에 들어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서 1994년에는 전문대학까지 졸업하기도 합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남편과 함께 그 동안 모아놓았던 돈으로 동남아세아에 있는 태국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1987년에 63㎡ 짜리 아빠트를 구입했었는데요. 1999년에는 그 아빠트를 팔고 90㎡짜리 아빠트는 새로 샀습니다. 생활형편이 더 높아져 개인 소유의 자동차 2대를 샀습니다. 2000년 이후에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가족나들이를, 그리고 여름 휴가 때에는 전국 려행이나 해외 려행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회 : 만약 옹순현이 그녀의 오빠처럼 자본주의 세계를 두려워한 채 고향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여유 있고 행복한 생활을 맛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군요. 다음에 소개할 사진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 사진은 산따지엔이라는 제목을 가진 사진입니다. 우리말 발음으로는 삼대건입니다. 중국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물건을 뜻하는 말입니다.



계획경제 시기인 1970년대의 산따지엔, 즉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물건은 손목시계, 자전거, 재봉틀이었다고 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화폐 교환 방식이 아니라 가정마다 보급되는 표(票)를 모아서 물건을 사야 했는데요. 당국이 주는 표를 모아 손목시계나 자전거, 재봉틀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개혁개방을 시작해 비약적으로 경제가 발전하던 1980년대 중국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물건은 천연색 텔레비죤, 랭장고, 그리고 세탁기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가 되면, 전화, 랭동에어컨, 그리고 콤퓨터가 중국인들의 산따지엔이 됩니다. 전시회에는 1970년대 산따지엔인 손목시계와 자전가 재봉틀 사진과 2000년대 산따지엔인 자동차, 아빠트, 려행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어 지나가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회 : 조선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었던 물건도 중국처럼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1970년대에는 옷장, 이불장, 재봉기였고, 1980년대에는 흑색 텔레비죤, 쎄이꼬시계, 전자시계, 1990년대에는 천연색 텔레비죤, 랭장고, 일본제 자전거였다가 2000년대 이후에는 콤퓨터, 손전화, mp3같은 전자제품, 오토바이를 가장 갖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2000년대 중국의 산따지엔은 무엇입니까?



2000년대 중국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은 자동차, 아빠트, 그리고 해외려행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은 경제수준이 아니면 갖기 어려운 것들인데요. 최근 중국인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자동차와 아빠트를 갖고 여가시간에 려행을 즐길 만큼의 경제수준이 되는 사람이 크게 늘었습니다.



사회 : 10년 단위로 변화하는 산따지엔을 살펴보니, 중국의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의 력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으로 눈에 띠는 사진은 ‘량방향 선택’이라는 제목이 사진입니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에는 중국도 정부 당국이 매 개인들의 직업을 정해주는 이른바 직업 분배 제도에 따라 학생들이나 제대군인들의 직업이 결정됐습니다. 직업분배제도는 개혁개방이 이미 진행되고 있던 1980년대 초까지도 실행되었습니다.



직업을 본인이 선택하지 못하고 당국이 정해준 대로 가야했기 때문에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학생들의 전공에 대한 세부사항이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관리자의 실수로 대학생들이 전공에 부합하지 않는 엉뚱한 곳에서 일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인재 낭비가 많았습니다. 마치 봉건시대에 부모가 독단적인 태도로 배우자를 정해주는 혼인처럼 기업과 대학이 모든 결정 권한을 갖고 있어, 학생은 통보된 결과에 따르는 수동적인 지위에 있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태도로는 주동적이고 열성적으로 기업소 일을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1989년이 되면서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나면 본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직업을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양방향 선택' 제도를 실시합니다. '량방향 선택'은 본인이 가고 싶은 직장을 스스로 골라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사회 : 좋은 직장일수록 기업소에서 필요한 인원은 제한되어 있고, 지원자는 많을 것 아닙니까? 기업소에서는 어떤 식으로 지원자 가운데서 직원을 뽑게 됩니까?



기업소에서는 주로 시험이나 접견 같은 방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봐서 우수한 성적을 얻거나 접견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는 사람들이 주로 선택됩니다. 따라서 양방향 선택 제도란 한마디로 자유경쟁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선택하되 경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원자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영어나 컴퓨터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미리미리 다양한 직업경험을 쌓아놓기도 합니다.



사회 : 자유경쟁방식 때문에 지원자들의 능력은 더 높아지게 되겠군요. 그렇게 되면 기업소들은 능력이 높은 지원자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중국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음은 어떤 사진입니까?



대학 강당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담요를 깔고 누워 자고 있는 사진입니다. 중국에서는 매년 대학 입학시험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시라고 합니다. 개혁개방 이후에 생겨난 제도입니다. 고시를 보는 자녀들을 따라 올라온 부모들이 대학 강당이나 체육관 바닥에서 담요나 신문지를 깔고 잠을 자며 자녀들을 응원하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의 교육은 거의 정지 상태였습니다. 모두들 정치와 사상개조에 힘을 쏟았고, 당 지도부는 혹시나 당시 이념에 반대하는 지식청년들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해 "농촌에 가서 배우고 오라"며 일제히 하방을 보냈습니다. 또 상급학교 진학이 학생들의 실력보다는 출신이나 성분, 연줄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혁개방 초기에 도입된 고시(즉, 대학입학시험)제도 덕분에 청년들은 출신이나 성분을 뛰어넘어 시험을 통해 공정하게 대학을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특히 고시제도가 도입되면서 실력이 없는 학생이 출신이나 성분이 좋다고 해서 대학을 가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실력위주로 학생을 선발하고 실력위주로 기업소 직원을 뽑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 사회가 출신과 성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실력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뀐 것이 중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끝으로 개혁개방 30돐 기념 사진전을 관람한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사진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주로 개혁개방에 대한 평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최초로 대학입학시험이 실시되던 사진을 보고 있던 47세의 한 시민은 자신을 고시 1세대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은 “고시에 합격해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사회에서 인정받는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지난 30년 동안의 개혁개방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북경에서 신문사를 다니고 있는 20대의 한 녀성은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고생이라고는 별로 한 경험도 없고, 개혁개방이 가져온 풍요로 인해 생활여건이 많이 좋아졌다”며 자신을 개혁개방의 수혜자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30대의 한 남성은 “개혁개방으로 인해 물질뿐 아니라 정신도 함께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며 “대외개방 후 많은 외국의 문화와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서 사회적 예의나 열린 마음가짐을 배우게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사회 : 2008년 북경에서 열린 개혁개방 30돐 기념 사진전에 전시되었던 사진을 통해 개혁개방 이후 중국사회의 달라진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제1세대 녀성 직공의 성공과정에서 중국의 급격한 발전에는 새로운 변화에 주동적이고 능동적으로 호응하는 중국 인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출신과 성분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람의 능력과 노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개혁개방 이후 변화하고 있는 중국의 의식주 생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오늘 시간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윤성호 방송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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