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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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정치 1

북한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30 22:17


사회 : 이번 순서는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시간입니다. 김정일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간부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학생들과 함께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방도를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에는 중국 경제의 개방정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개혁개방이후 중국의 정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은 지금 인민을 먹여 살리고 국가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통사회주의 정치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정치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도움 말씀을 위해 오늘도 윤성호 방송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윤 : 네, 안녕하십니까?



사회 :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치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대외정치로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대외정치,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은 '기미(羈縻)' 정책이었습니다. 기미란 굴레를 씌워 얽맨다는 뜻의 한자어입니다. 주변국을 중국의 세력 범위 안에 묶어두고 통제하는 정책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그늘에 가려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유명무실했던 기미정책을 폐기하고 도광양회 정책을 대외정책의 뼈대로 삼았습니다. 도광이란 빛을 감추고 밖에 비치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고, 양회란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약자가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 닦을 때 많이 인용되는 중국의 사자성어입니다.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여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었던 계책이 바로 도광양회책이었습니다.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시작하던 1980년대에 도광양회 정책에 따라,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국력이 생길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면서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전술적으로도 협력하는 외교정책을 펼쳤습니다. 도광양회 정책은 그 이후 20여 년 간 중국의 대외정책을 대표했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도광양회 이 정책을 통해 중국은 국제사회의 도움을 얻어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는 듯합니다. 코소보 문제나 국제 테로 문제, 아프리카 내전 문제 등에 중국의 립장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외정책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1990년대 강택민 시대부터 ‘조용히 실력을 키우는 데서 벗어나 '책임 있는 대국(大國)'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이른바 대국외교를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11월, 호금도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제4세대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부터는 도광양회라는 외교로선을 사실상 접고 평화적으로 일어선다는 이른바 화평굴기 로선을 채택하게 됩니다.



'굴기'는 '산이 우뚝 솟은 모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003년 10월 해남도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정필견 중앙당교 상무부장이 처음으로 주창한 말입니다.



중국은 도광양회와 대국외교를 통해 이미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보고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 상태입니다. 굴기외교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중국 위협론을 완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국외교의 틀을 이어받아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치에 걸맞은 행동과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항하면서도 평화와 자주성을 견지하겠다는 유연한 외교전략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사회 : 중국 정부가 외교 전략을 수정한 리유나 계기는 어떤 것입니까?



윤 :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 한 이후 서로의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대만 문제, 인권 문제, 중국의 WTO(세계 무역기구) 가입 문제 등 갖가지 사안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93년, 중국은 2000년에 열리는 올림픽을 자기나라에서 개최하겠다며 올림픽 유치신청을 하고 실현을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시기에 개최되는 올림픽을 개최하여 새로운 세기의 주인은 중국임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들의 암묵적 방해로 2000년 올림픽 개최권은 오스트랄리아 시드니에게 돌아갔습니다. 오스트랄리아와 중국의 표 차이는 겨우 2표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2000년 올림픽 개최를 기정사실화하고, 북경 시내에 대대적인 축제준비까지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권이 오스트랄리아에 넘어감으로써 중국인들의 간절한 념원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이 심리적으로 입은 상처는 컸습니다. 그 때 중국인들에 선풍적 인기를 얻었던 책이 한권 있습니다. <중국가이설부>라는 책입니다. 우리말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책인데요.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질서에 더 이상 휩쓸리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수백만부가 팔리면서 중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회 : 그런 분위기였다면,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미국에 대해 좀 더 공세적인 태도를 보였겠는데 어떻습니까.



윤 :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중국과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조금 더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이런 추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1992년 코소보 전쟁에 개입한 미국 정보당국의 잘못된 전황정보로 나토 폭격기가 유고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한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2001년 미 해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해남도 인근해역에서 충돌해 중국 전투기가 추락하고 미군 정찰기는 해남도에 비상착륙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중국 곳곳에서 인민들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기초한 극렬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중국 정부는 인민들의 극렬 시위를 방관하고 나중에 인민들의 투쟁을 무마하는 대가로 미국과의 사후담판에서 일정한 보상과 외교적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그 때 얻어낸 성과 중 하나가 2008년 북경 올림픽 개최와 WTO가입이었습니다. 2008년 여름 올림픽 유치 경쟁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미국 하원은 천안문 사태 이후 개선되지 않는 중국의 인권문제를 지적하며 올림픽의 중국 개최 반대 결의안까지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중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국제적 분위기를 조성해주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면 중국의 인권 향상은 물론 대만과의 긴장완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할 정도로 중국 정부를 지원했습니다.



사회 : 중국이 굴기정책을 실시하면서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처럼 보입니다. 중국의 대외정책 변화 이후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윤 : 사실, 협력과 공존을 통해 일어서겠다는 중국의 화평굴기 정책 자체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를 의식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중국이 힘이 강해지면 서방세계에 위협이 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때마다 미국의 의심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무역마찰을 빚는 일이 있지만, 사실 미국이라는 큰 시장이 없었다면 중국이 이처럼 빨리 경제발전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중국 지도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고 있지만, 중국에서 수입하는 생필품이 없다면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과 미국은 매년 중미경제전략대화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회의에는 양국 정부의 지도부와 주요기업소의 지배인들이 총출동합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또 세계 여러 나라와 교역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운 교역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중미양국 경제의 의존관계는 이제 서로 분리하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 중국이 발전하면서 중국의 주변국들은 중국의 민족주의와 패권주의를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은 중국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나날이 높아가는 중국인들의 중화주의에 대해서는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 인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은 어떤 정도이고, 또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윤 : 얼마 전까지 중국 역사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은 한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역사를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투쟁의 역사로 파악해왔습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는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티베트나 신장 지역의 독립 움직임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탄생한 것이 바로 ‘중화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화민족이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 존재했었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중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킨 이념입니다.



이런 새로운 이념 때문에 중화의 민족영웅으로 한 무제, 당 태종과 더불어 원나라의 징기스칸과 청나라의 강희제가 같은 이민족 왕조의 제왕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사실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도 이와 같은 중화민족주의의 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중화민족주의는 대외적 침략을 위한 이념이라기보다는 중국 인민을 내부적으로 단결시키기 위한 이념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중화민족주의에 우려와 경계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여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 :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대외정책의 령역이 국내정책의 령역으로 전환되었고, 중국이 대 홍콩정책의 기본인 이른바 일국양제를 실시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일국양제 정책에 대해 짤막하게 평가를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윤 : 영국은 중국과 벌인 아편전쟁에서 승리해 1842년 남경조약을 체결했고, 그 조약으로 홍콩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은 쇠락했고 중국은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이 때문에 1982년부터 영국과 중국은 홍콩, 구룡반도, 신계 등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중국의 땅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습니다.



중국은 홍콩 지역 전체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등소평의 완강한 태도에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대처는 50년 동안 홍콩의 제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이른바 일국양제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1984년 홍콩반환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 약 40만 명에 달하는 홍콩 사람들은 중국 정부의 일국양제에 의구심 때문에 영국연방을 비롯한 세계각지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중국 정부는 체제의 포용력을 과시하고 대만과의 원만한 통일협상을 위해서 일국양제를 반드시 성공해야 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부흥을 위해 경제적 특혜와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은 본토와 홍콩의 통합을 이루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영국과 중국이 홍콩과 중국 사이의 일국양제 정책을 실시하기로 한 시간이 앞으로도 40년 가까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간에 양측이 하나의 국가로 온전히 통합될 것인지 조금 더 지켜봐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물건이 량 쪽을 오고가면서 서로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홍콩의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점점 커져갈수록 양국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점차 줄어가고 있습니다.



회 :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은 중국의 급격한 발전을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은 중국이 아직 경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이라고 강조하고 있고, 중국의 군비증강은 오직 자기나라를 수호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힘주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본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윤 : 2006년 11월 중국 CCTV는 다큐멘타리 12부작 <대국굴기>를 방송했습니다. 조선 사람 중에도 이 방송을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대국굴기>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 등 근대사 강국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출현했는지를 탐구하는 프로그람입니다. 원래 중국공산당 핵심 지도부의 집체학습 내용을 근거로 제작된 방송입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영원한 강대국이란 있을 수 없으며,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함께 사상과 문화, 정치와 사회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영상물에는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용어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년이라는 제작기간 동안 수많은 국내외 학자,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체 만들어진 이 프로그람은 인민들의 반응이 좋아 1차 방송이 끝난 직후 재방송을 했고, 책과 알판으로 팔려나갔습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은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당시 중국정부는 북경 올림픽을 그 동안 경제성장에 집중하느라 소홀히 했던 인민들의 소양과 의식개조를 위한 획기적 계기로 삼기도 했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시민의식 향상, 사회질서와 공중도덕 확립을 대대적인 대중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국굴기>의 내용과 북경 올림픽 이후 중국 지도부의 정책을 볼 때, 중국공산당은 앞으로도 인민생활 향상과 부강한 국가 건설을 추진하되, 한편으로는 경제발전 수준에 걸맞는 사상과 문화, 정치와 사회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 : 네. 그럼 끝으로 만약 조선이 개혁개방으로 나아간다면 중국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일 것으로 보십니까?



윤 : 중국 정부는 그 동안 조선 당국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개혁개방으로 나오라고 조언해왔습니다. 사실,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조선반도에 전쟁분위기를 몰고 오는 조선 당국에 대해 중국지도부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여왔습니다. 만약 조선이 개혁개방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대규모 지원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회 : 지금까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와 향후 전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조용히 힘을 비축하던 중국이 강대국으로 발전하면서 그에 걸 맞는 지위와 역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만, 그것이 조선의 개혁개방과 세계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중국 지도부와 국제사회의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개혁개방 이후 달라진 중국의 정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마련하겠습니다.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오늘 시간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윤성호 방송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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