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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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제 개방

북한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30 22:17


사회 : 이번 순서는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시간입니다. 김정일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간부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학생들과 함께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방도를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에는 중국의 공장, 기업소 개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경제 개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은 경제특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경제를 점진적으로 개방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자세한 도움 말씀을 위해 오늘도 윤성호 방송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윤 : 네, 안녕하십니까?



사회 : 중국의 개방 정책, 어떤 것입니까? 간략하게 설명해주시죠.



윤 : 중국은 1978년 12월 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 경제적 측면에서 두 가지 정책을 추진합니다. 대내적으로는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경제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죠.



개방정책이란 글자 그대로 나라의 문을 여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경제발전을 위해 나라의 문을 연 것은 자력갱생의 원리를 바탕으로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과거의 전략을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새로운 전략으로 전환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방 로선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력점을 둔 것은 경제특별지구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나라들과의 경제 교류와 협력에 유리한 지역을 골라 그 지역에 대해서는 특별관리 정책을 실시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사회 : 방금 중국 개방 정책의 핵심은 경제특별지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정부가 건설한 대표적인 경제특별지구는 어디였습니까?



윤 : 중국 정부는 경제특별지구를 한꺼번에 건설한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건설했습니다. 먼저 개방정책이 시작된 1979년 7월에는 우선 광동성의 심수, 주해, 산두, 그리고 복건성의 하문 등 총 네 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하였습니다. 5년이 지난 1984년 봄에는 대련, 진황도, 천진, 연대, 청도, 연운항, 남통, 상해, 영파, 온주, 복주, 광주, 잠강, 북해 등 열 네 개 도시를 ‘연해개방도시’로 지정했습니다.(연해개방도시는 경제특별지구와 거의 같은 정책이 실시됐습니다.)

이어 1985년 소주, 무석, 상주, 불산 등 11개 도시와 그 주변의 농촌지역이 연안경제개방구(沿岸經濟開放區)로 지정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강소성, 서주를 중심으로 산동성, 호남성, 안휘성을 포함하는 준해경제특구(准海經濟特區)가 설치되었습니다.

1988년 해남도를 해남성을 승격시켜 대외개방경제정책을 섬 전체에 실시하였습니다. 1990년 4월 에는 상해 포동지구를 제8차 5개년계획의 주요 개발구로 지정하고 대외개방의 거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사회 : 중국 정부가 경제특별지구 건설을 통해 얻으려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윤 : 당시 중국 정부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돈과 기술이었습니다. 경제특별지구에 외국기업소들을 불러들여 외국기업이 가진 자금과 기술을 중국경제발전에 이용하는 것이 경제특구정책의 목적이었던 것이죠.



사회 : 그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 정부가 특별지구에서 실시한 정책은 어떤 것입니까?



윤 : 중국 정부는 경제특별지구에 대해 중국 본토에서 시행한 경제 정책과 다른 특별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경제특구에 정부를 따로 두고 특구 내 경제 관리에 대한 독자적인 권한을 주었습니다. 당시 중국 경제 개혁의 핵심은 중앙이 가진 관리 권한을 지방이나 기업소, 개별 농가로 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특구정책에서도 그와 같은 핵심 정책을 그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둘째, 특별지구에 들어온 기업소에 대해서는 자주적인 경영권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래야 열성적으로 생산 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특별구역에 들어온 기업소에 대해서는 본토에 있는 기업소에 비해 세금을 적게 내도록 조치했습니다. 세율우대정책을 실시한 것입니다. 나라에 내야할 세금을 깎아줌으로써 자금이 많고 높은 기술을 가진 우수한 기업소들을 특별지구에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일반 기업소의 소득세는 기본적으로 33%입니다. 그러나 특구에 들어온 외국 기업에 대해서는 일반 기업소의 절반도 안되는 리익금의 15%를 세금으로 내게 했습니다. 투자경영기간이 10년 이상인 외자 생산기업에 대하여는 리익이 발생한 해부터 2년간 세금 전액을 면제했습니다. 3년간 50%를 깎아주었습니다.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소에 대해서는 세금을 10%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외국의 기업소들이 특별경제 지구에 자금과 기술을 투자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드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공장을 세울 땅을 더 눅게 공급하거나, 로동자들의 임금을 낮추거나, 공장을 세우거나 물건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어 기업소 활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경제특구 정책은 한마디로 외국기업소 우대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국 정부는 외국 기업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해 농업과 공업생산을 약 4배 이상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사회 : 사실 개방정책이 처음 시행된 것은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외국기업을 끌어들여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전략을 실시했는데, 특구의 자본주의 바람이 본토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윤 : 중국 지도부도 특구가 가진 복잡한 성격 때문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 점진적으로 특구정책을 추진합니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특구 선정 기준으로 세 가지를 검토합니다. 첫 번째는 주변지역에 자본․기술이 풍부하며 수출시장이 될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예를 들어 홍콩이나 대만 등과 인접한 지역을 우선 선정한 것이죠. 두 번째는 대내외 여러 도시들과 연결될 수 있는 지역을 골랐습니다. 그래야 특구의 경제적 성과가 내륙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체제개혁의 실험장이기 때문에 체제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을 골랐습니다. 이 때문에 가능하면 내륙으로부터 거리가 먼 해안가 지역이 주로 특구로 선정됐습니다. 중국 정부는 또 특구와 본토 사이의 경계에 철조망 등을 세워 특구를 격리시키는 조치도 취했습니다.



사회 :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나라가 격렬하게 대립하던 1970년대에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도부는 경제특구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는데요. 특구에 대한 어떤 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힘들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윤 : 그렇습니다. 중국 정부는 한편으로는 경제특구의 부작용을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특구가 가져다줄 성과에 대한 또렷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은 경제특구에 자신감이 컸습니다.

등소평은 “특구는 하나의 창구이다. 기술의 창구, 관리의 창구, 지식의 창구이며, 또한 대외 정책의 창구이다. 특구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게 되면, 지식을 획득하고 그 나라를 배울 수 있다.”며 적극적인 특구 설치를 강조했습니다. 경제특구 정책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해남도를 경제특구로 추가한 1988년에는 “특구는 개방의 기지가 될 것이며, 경제 방면 및 인재양성 방면에서 잇점을 얻을 뿐 아니라, 중국의 대외적 영향을 확대시킬 것이다.”, “현재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우리의 경제특구 건립의 결정은 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 : 경제특구와 개방정책의 성과는 무엇입니까?



윤 :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한 개방정책은 여러 가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역시 개방정책과 경제특구가 중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1980년에서 1999년 사이 중국 경제특구의 연평균 총생산 성장률은 심수 33%, 산두 27%, 주해 24%, 하문 19% 등으로 중국 전체의 성장률 9%보다 훨씬 높아 경제특구가 중국의 고도성장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특구가 안정되면서 외국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는 든든한 창구가 생겼고, 수출을 통해 외국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으며, 개방을 통해 얻은 자금과 기술로 중국 본토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국 각 성이나 성급의 대도시, 대형기업소, 중앙의 각 부문이 경제특구에 설치한 대표기구나 기업소는 만개가 훨씬 넘습니다. 내륙의 국가기구와 기업소가 경제특구에 공장을 세워 돈을 벌고 있는 것입니다. 내륙지구는 또 특구에서 국제시장 정보를 입수하고, 수출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는 등 특구의 선진적 경험을 학습하여 자신의 개혁개방 및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이용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 경제는 일본이나 독일을 뛰어넘어 미국 다음가는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얼마 전 중국이 5년 뒤인 2016년에는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전망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개방정책의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 중국의 대표적인 경제특구라면 아무래도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들렸던 상해 포동지구를 들지 않을 수 없는데요. 포동지구가 경제특구로 지정된 후 포동에서 생산 활동을 벌이는 기업소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윤 : 중국은 상해 포동을 개혁개방 정책을 통한 경제발전의 핵심지역으로 집중 육성해왔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중국이 용이고 상해가 용의 머리라면 포동은 여의주에 해당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 정부는 총1억 6천 만평을 특구로 지정하여 집중 육성한 뒤 경제적 성과를 상해, 나아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한다는 전략에 따라 포동을 생산, 기술발전 및 상품수송의 중심지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제너럴모터스, 아이비엠, 제너럴일릭트릭, 필립스, 알카텔, 시티뱅크 등 전 세계 최고 기업 100여개가 포동에 들어왔고, 1만개가 넘는 중국 기업들이 포동에서 경제활동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2009년 기준 상해의 국내총생산(GDP)은 2,183억 딸라로 드디어 홍콩을 앞섰습니다.



사회 : 경제적 성과는 흔히 정치적 또는 외교적 성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중국의 개방정책으로 중국의 대외관계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윤 : 1978년 중국은 총 99국가와 수교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방위 개방 정책을 실시한 이후인 2001년 말, 중국은 162개 나라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대만과 수교관계를 맺고 있는 스물여덟개 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와 수교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외교적으로 전 세계 모든 나라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나라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개방정책이 가져다준 외교적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 : 중국의 개방 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윤 : 가장 큰 리유는 개방에 대한 중국의 지도부의 일관된 의지와 정책이겠죠? 개방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나 우여곡절에 신념이 흔들리거나 개방정책이 후퇴했다면 그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경제특구를 잘 골랐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 및 기업들과 협력하면서도 내륙의 경제발전을 주도할 수 있는 지역을 적절하게 선정함으로써 특구의 성과가 중국 경제 전체의 경제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

죠.



세 번째는 중국 인민들의 질 높은 노동력과 성실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개방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나라들의 경우 특별히 폐쇄정책을 펼치는 것이 아닌데도 이렇다할 발전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큰 리유는 열심히 일하는 인민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사회 : 개방정책이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지만, 부작용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개방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 어떤 것이었습니까?



윤 : 크게 두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개방이 확대되자 부정부패가 늘고 불법적인 수입이나 수출이 증가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경제특구에 대한 각종 우대정책을 실시하면서 특구 지역과 나머지 지역 사이의 경제격차가 발생한 것입니다.



중국 정부는 이와 같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한편으로는 부정부패 척결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특구에 대한 각종 우대 제도를 폐지하거나 축소하고 있습니다.



사회 : 수많은 성과를 거둔 중국의 개방정책. 중국의 개방 정책은 이제 끝난 것인가요? 아니면 당분간 지속될까요? 앞으로 중국의 개방정책을 전망해주시죠?



윤 : 중국의 진덕명 상무부장은 얼마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국이 2001년 12월11일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이후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았다. ··· 중국은 향후 10년 동안 더욱 많은 개방정책을 펼 것이다.”

진부장은 해남도에서 열린 경제관련 회의에서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득이라든가 절대적으로 손해라는 것은 없고 실보다 득이 많으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말했습니다.

진부장은 또 WTO 가입 이후 중국의 수출액은 4.9배, 수입액은 4.7배 증가했다. GDP(국내총생산)는 2배 이상 늘었으며 1인당 총생산도 800달러에서 4000달러로 5배나 증가했다. 10년 전 중국의 대외투자는 10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2010년에는 600억 달러에 달했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개방정책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향후 10년 동안에도 더 많이 개방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중국의 개방이 앞으로도 얼마나 더 지속되고 또 얼마나 더 큰 성과를 거둘 것인지 좀 더 지켜봐야겠군요.

사회 : 지금까지 중국의 개방 정책과 그 성과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경제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자력갱생 로선을 과감하게 폐지하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협력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개방 로선을 과감히 선택한 중국. 중국은 결국 개방을 통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중국의 개방이 가져다준 성과는 오늘날 조선 경제가 파탄난 리유와 조선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 지 똑똑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와 인민들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는 시간 마련하겠습니다.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오늘 시간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윤성호 방송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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