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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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7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김정일과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황장엽 망명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김일성 서기실 리론서기이자 김정일의 스승이였던 황장엽, 그는 왜 가족들과 벗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망명을 선택한 것일까요? <추적, 사건과 진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지난이야기 : 황장엽이 망명을 신청한지 5일 만에, 김정일 독재집단은 ‘변절자야 갈테 면 가라’는 립장을 발표하며 북경에 파견한 요원들을 철수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황장엽 처리 문제를 놓고 남조선과 중국 간의 교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17일 북조선이 발표한 성명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지만, 어쨌든 북조선의 립장이 변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것은 남조선 총령사관을 감시하던 북측 요원들이 17일 철수한 이후 나타나지 않는 데서도 확인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황장엽이 머물러 있는 남조선 총령사관 주변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이미 배치된 차량 장애물과 방탄차 두 대 외에도 다시 세 대의 장갑차가 추가로 배치됐습니다. 또 령사관 주변에 50미터 간격으로 배치된 무장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무장경찰 1백여 명을 추가로 배치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독재집단이 ‘황장엽이 랍치되었을 경우 단호한 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힌 만큼, 보복행위에 대해서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북조선의 성명이 나온 직후 중국 정부의 태도에도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18일 중국 외교부가 황장엽 사건에 대한 공식 립장을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 황장엽 비서는 현재 남조선의 령토와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갖는 치외법권적 지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황비서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있으며, 관련 당사자들이 최선의 해결방법을 찾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FO) 또한 이번 사건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최선의 해결책이 나올 수 있도록 모색되기를......



중국 정부는 황장엽이 남조선 총령사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망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조선 대사관 관계자들과 면담조차 꺼려했던 때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진전된 태도였습니다. 또한 중국 정부는 황장엽 사건에 대한 보도통제를 풀고 2월 19일 신화통신을 통해 황장엽이 남조선 대사관에 진입했다는 것과 중국은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안전조치를 취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남조선과 중국 간의 협상도 급물살을 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곤혹스러운 립장은 여전했기 때문에 쉽사리 결론이 나진 않았습니다. 남조선 정부는 중국 당국의 외교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처리해줄 것’을 계속 요청했습니다. 남조선 정부가 이 방침을 내세운 것은,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사람을 거부할 경우 중국 정부가 유엔난민협약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북조선도 자신의 립장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조선 정부는 황장엽을 남조선으로 직접 데려오는 것 보다는 제3국으로 추방하는 형식을 취한 뒤 서울로 데려오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것이지만 ‘중국 령토에서 망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제3국으로 황장엽을 추방했으니 황장엽 망명 문제는 제3국과 남조선 정부와의 문제’라는 명분을 중국 정부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협상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등소평이 사망하면서 협상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2월26일에 다시 열린 협상은 역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3월로 넘어갔습니다. 3월7일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가 나왔습니다.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이 황장엽 사건을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조선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도록 처리”하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남조선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것으로 중국 정부가 남조선의 립장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조선 정부는 황장엽을 제3국에 체류시킬 것이라는 안을 제시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협상을 벌렸습니다. 남조선의 제안을 받아든 중국 정부는 당가선 외교부 부부장에게 지시해 북조선의 김영남 외교부장을 면담하도록 했습니다. 그로부터 6일 뒤인 14일 리붕 중국 총리가 ‘조건이 성숙됐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이튿날 남조선과 중국 정부는 황장엽을 필리핀으로 이송하는 데 최종 합의했습니다.



피가 마르는 듯한 시간을 견디며 이때를 기다려온 황장엽은 정작 3국으로의 이송이 결정되자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고통스럽게 밀려왔습니다. 황장엽은 당시의 심정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황장엽 : 북경에 있을 때는 내사랑하는 가족들, 생사도 알 길이 없는 가족들이 있는 평양과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다소나마 위안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다 건너 먼 필리핀으로 떠나야 한다고 하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져 마치 온몸을 면도칼로 그어대는 것 같았다.



또한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김정일을 타도하겠다는 자신의 결의가 과연 옳은 것이였는지에 대해서도 처음처럼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황장엽 : 앞날이 유망한 자식들과 제자들의 희망을 짓밟은 채, 그들 모두가 이룰 수 있는 일을 합친 것보다 더욱 소중한 일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내 행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평양에서 목숨을 끊는 것보다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짓눌러왔다. 게다가 민족을 위한 소임도 다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다면 죄는 더 커지지 않겠는가.



황장엽은 감상에 젖어 있는 자신을 매섭게 질책했습니다. “인민을 무참히 굶겨 죽이고 자신의 더러운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의 운명을 마음대로 우롱하는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을 반드시 타도하겠다”는 처음의 결의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3월 17일 저녁 9시경, 남조선 총령사관 남쪽 통로를 통해 17인승 자동차 3대가 빠져나가는 것이 목격됐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장엽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북경 수도공항을 이륙해 필리핀으로 향했습니다. 황장엽이 북경에서 망명을 신청한지 34일만의 일이였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일곱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황장엽 회고록, 시대정신

- 북경상황, 동아일보, 1997-02-19, 20일

- 정부, 모든 외교채널 총동원, 조선일보, 1997-02-14

- 중, 전례없어 망설일 가능성도, 조선일보, 1997-02-13

- 한-중-북 팽팽한 「3각외교전」 막올라, 조선일보, 1997-02-13

- 중、 황비서 망명 확인, 조선일보, 199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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