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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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천도교 교령 오익제 랍치사건 2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출연: 해설/내레이션/대변인/김용순/김정일/사람들





내레이션 1997년 8월 남조선의 종교지도자 오익제가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 장 군님의 품을 찾아 한 달음에 달려왔다고 요란하게 선전했지만 평양역에 도착한 오 익제의 표정은 어두웠고 일그러져 있었다. 오익제는 도착 성명을 발표한 직후 어디 론가 끌려갔고 그 뒤로 오랫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과연 오익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추적, 사건과 진실, 남조선 천도교 교령 오익제 랍치사건>





<지난이야기> 1997년 8월, 남조선 천도교 교령 오익제가 국제열차를 타고 평양역에 도착했습니다. 선전기관들에서는 오익제가 장군님의 품에 안기기 위해 의거입북했다고 선전했지만 자진입북이라고 하기에는 의심가는 점이 많았습니다. 한편 사람들속에서는 황장엽 망명 사건에 맞대응하기 위해 잡아왔다는 소문이 도는데......





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천도교 교령 오익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익제가 평양에 도착할 당시 환영집회 때 동원됐던 사람들조차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오익제가 선전에 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정일 독재집단의 선전대로라면, 오익제는 남조선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인데, 그런 사람의 의거입북에 대해서 별다른 선전을 하지 않은 리유가 궁금해집니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오익제 사건이 발생하기 몇 개월 전에 있었던 한 사건에 대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1997년 2월 남조선 정부가 중대 발표를 한다며 국내외의 기자들을 소집했습니다.



효과 : 기자회견 장소

대변인 : 12일 오전 황장엽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가 중국 북경 주재 한국총령사관에서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기자들 : 망명한 리유가 무엇입니까? 북한과 동맹관계에 있는 중국 정부가 한국 행을 허락할까요? 황장엽 비서의 가족들도 함께 나왔습니까? 등등



2월 12일 오전 9시경 황장엽 로동당 비서가 중국 북경에 있는 남조선총령사관으로 들어가 망명을 신청한 것입니다. 김일성의 리론서기였고,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였으며, 주체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진 황장엽의 망명은 북조선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황장엽은 굶어 죽어가는 북녘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망명을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정일이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남조선 괴뢰들의 랍치라고 생각했습니다. 황장엽이 망명을 신청한 다음날인 13일 북조선 외무성에서, 남조선 당국이 황장엽을 랍치했을 경우에는 응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데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발적인 망명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김정일은 황장엽을 도로 잡아 오든가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황장엽 사건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테로를 지시한 것입니다. 이 지시에 따라 국가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는 물론 35호실, 대외연락부, 통일전선사업부, 작전부, 심지어 해외 외교공관의 인원들까지 총동원돼 남조선총령사관에 집결했습니다.



효과 대치상태



수백명의 북조선의 무장인원들이 중국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남조선총령사관으로 진입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저지당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1,000명의 무장경찰과 장갑차까지 동원해 경비를 강화시켜 자기 령토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결국 황장엽에 대한 테로는 불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갔고 김정일은 할 수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날 밤 당 비서들과 각 부 부장 및 제1부부장들에게 목란관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목란관에 모인 간부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였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황장엽 비서와 당 사업을 해온 나이 많은 간부들은 자신들에게까지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벌벌 떠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불안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김정일이 들어왔습니다. 자리에 앉은 김정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간부들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습니다. 마침내 김정일이 입을 열었습니다.



김정일 : 오늘 내가 여기 나오기 전까지 수령님 초상화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소. 수령님께 물어 보았다구, 그 황장엽이가 맞냐고. 우리와 함께 평생을 함께한 그 황장엽이가 맞냐고. 내가 오늘처럼 힘들고 괴로워본 적이 없소.

여1 : 장군님....



누군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두 다 우는데 울지 않는다면 충성심이 약하다고 락인 찍히기 때문에 울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간부들 모두가 손수건을 꺼내 들었을 때 김정일이 격하게 소리쳤습니다.



효과 : 울음소리

김정일 : 여기 또 누가 황장엽이 같은 놈이 있어? 날 배신하고 갈테면 가란 말이야! 가라고!



그때 대남담당 비서 김용순이 벌떡 일어나 웨쳤습니다.



김용순 : 장군님, 우린 장군님과 운명을 함께 하겠습니다. 우린 죽어도 장군님 무릎을 베고 죽겠습니다.

간부들 : 장군님, 우리를 믿어주십시오! 우리를 믿어주십시오!



이로부터 며칠 후 로동신문을 비롯한 공화국의 모든 선전물들이 장군님 무릎을 베고 죽겠다는 자결충성을 호소했습니다. 이에 따라 군(軍)은 자폭정신, 민(民)은 자결정신, 심지어 학생들과 어린이들까지도 총폭탄, 총알 서약을 하도록 전 사회적인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한편 김정일은 황장엽에 대한 테로가 불가능해지자 ‘황장엽 망명 사건’을 덮을 수 있는 사건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남조선 천도교 교령 오익제 랍치 사건>, 두 번째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전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 11년만의 폭로(신동아, 2008년 10월호)

- 황장엽 회고록(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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