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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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부. 숙청의 회오리. 세 번째

황장엽 회고록 2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3-03-20 18:03

당 중앙검열위원회에서는 수시로 대학에 나와 학자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들은 학교에 나와서는 나를 꼭 만나보고 갔는데, 총장이나 당비서의 동향에 대해서도 은밀히 파악하려고 들었다. 나는 그때 복잡한 정치투쟁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또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하나같이 모른다고 대답했다.


1956년 8월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의 최창익이 이끄는 연합세력이 김일성을 정면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살벌한 기운이 북한 전역을 감도는 가운데 연안파이자 상업상인 윤공흠과 직업동맹위원장 서휘, 김일성종합대학 대학 당위원장 홍락응 등이 중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학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사상검토 회의로 들끓었다. 이 사상검토로 많은 학자들이 희생당했다. 은밀히 도는 소문에 따르면 김일성대학 교수들 가운데 김일성을 반대하는 선언문을 쓴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상검토를 거치지도 않고 비밀경찰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평양경제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심재윤 선생은 숙청 회오리가 한창일 때 김일성대학 통신학부를 맡고 있었다. 그는 연안파의 최창익이 체포되자 최창익은 나쁜 놈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에서는 그가 연안에서 활동한 종파분자이고 또 연안에 가기 전에는 일본에서‘일월회’라는 종파단체에 소속되었다는 것과, 그의 동료들이 대부분 종파분자라는 점을 들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를 맹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은 나에게도 그와 관계를 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그는 인정에 이끌려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나는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추락이 임박함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내 힘으로는 도울 수 없었다. 그는 평안북도로 쫓겨갔는데, 그 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때 그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아마도 쉰이 넘었던 것 같다.


(중략)


해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력사의 진리를 보았다, 지금까지 해설의 윤옥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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