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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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2




안녕하세요.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의 장성무입니다. 오늘은 제7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북조선의 교과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의 조작으로 남조선에 단독정부가 먼저 들어선 상태에서 수립되었다’며 분단의 책임이 미국과 리승만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쏘련과 김일성은 조선의 분단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요?



력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쓰딸린과 쏘련의 신속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남조선의 대한민국 정부보다 먼저 준비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1945년 해방에서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의 쓰딸린과 쏘련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1991년 쏘련이 해체된 후 모스크바의 구쏘련 공문서관이 공개되자 이 문제와 관련된 중요 문서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1945년 9월 20일 쓰딸린이 제1극동군 사령관 와씰렙쓰끼에게 내린 비밀 지령이 담겨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북조선 령토 안에 비쏘련 정권과 반일적 민주 정당 련합에 의한 부르죠아와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북조선에 반일적 민주 정당을 결성한다. 둘째, 북조선의 사유재산 및 공적 재산은 쏘련 당국의 보호 하에 둔다. 셋째, 북조선 주둔 쏘련군은 규률을 엄수한다. 넷째, 북조선 민간행정 지휘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가 수행한다.



여기에서 비쏘련 정권이라 함은 김일성을 념두에 둔 것이였습니다. 이러한 쓰딸린의 점령지령은 쏘련 제25군 사령관 찌스짜코브와 제1극동 방면군 군사평의회 위원 스찌코브, 쏘련이 선택한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 등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진행됩니다. 조선의 독립 과정을 론의한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렸던 1945년 12월 이전까지 쏘련은, 8월 25일 평양에 진주하여 10월 3일에는 쏘련군에 의한 인민정부를 세우며, 10월 8일에는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련합회의 개최하고 11월 19일에 드디어 5도행정국을 만들어 냅니다.



이를 기반으로 다음해인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 각 행정국 및 각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에서 만장일치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창립합니다. 이 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 조선림시정부 수립을 위해 열린 1차 쏘미공동위원회가 열린 시점보다도 앞선 것이엿습니다. 당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한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을 골자로 한 공산주의적인 개혁을 추진합니다. 이렇듯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 토지 개혁을 시행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 북한 지역을 통치하는 단독정부였습니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1947년 3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꿉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38도선 남쪽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된 5월 10일보다 앞선 4월 29일 헌법 초안을 승인합니다. 이렇듯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쏘련과 쓰딸린에 의해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과정인 헌법 공포, 내각 승인, 수상 선출만을 남겨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은 남조선 단독선거가 먼저 치러졌던 상태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닌, 쓰딸린과 쏘련에 의한 필연적인 공산주의 정부 수립의 과정이였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 제7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제8과 ‘김일성의 등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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