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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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2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김정일과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황장엽 망명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김일성 서기실 리론서기이자 김정일의 스승이였던 황장엽, 그는 왜 가족들과 벗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망명을 선택한 것일까요? <추적, 사건과 진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



지난이야기 : 1997년 2월 12일 아침 북경주재 북조선 대사관을 빠져나온 황장엽은, 남조선 총령사관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북조선과 피로써 맺은 형제국가라는 중국에서 과연 황장엽의 망명이 성사될 수 있을지,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데......



지난 시간에 보내드렸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황장엽이 중국 주재 북조선 대사관을 나왔을 때, 따라붙은 경호원들을 어떻게 쉽게 따돌릴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당시 황장엽은 일본에서 있은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주최의 국제토론회에 참가하는 한편 조-일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와 쌀 추가지원 확보를 위해 1월 30일부터 13일간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북조선과 외교관계가 없는 일본에서 망명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것 같은데, 황장엽은 북조선의 형제국가인 중국에서 망명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잠시 짚어보고 가겠습니다.



먼저 황장엽이 일본에서 망명하지 않은 리유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의 상황은 황장엽이 중국에서 경호원들을 쉽게 따돌릴 수 있었던 리유와 련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황장엽은 일본에서 망명하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황장엽의 일정은 교또에서 시작되였는데 4일부터는 도꾜로 와서 중국으로 출발할 때까지 ‘게이오플라자호텔’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한 장소에 오랜 시간 머물다 보면 경계도 느슨해지고 자연스럽게 틈이 생길 것으로 보았던 황장엽은 ‘게이오플라자호텔’을 탈출 장소로 삼았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황장엽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황장엽 : 원래 내가 망명을 계획했던 곳은 일본이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한 지 하루도 안 지나서 나는 불길한 예감 속에 그 결행을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총련 쪽에서 나온 사람들이 호위라는 구실로 밤낮없이 내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면서 도무지 몸을 뺄 틈을 주지 않았다.



황장엽에 대한 경호가 얼마나 삼엄했는지는 다음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이오플라자호텔에서 황장엽과 마주친 적이 있는 리연길이, 남조선 잡지 ‘월간중앙’과의 대담에서 한 말입니다.



리연길 : 나는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눈에 망명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황장엽의 옆에는 조총련에서 파견된 건장한 두 명의 경호원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경호지 사실상 포위되어 있었다. 두 명의 경호원들이 황씨 양쪽에 밀착하여 걷고 있었고 또 조금 떨어져서 4-5명의 경호원들이 인간벽을 만들어서 황 비서를 호위하고 있었다.



총련이 동원된 경호는 황장엽이 “낌새를 느낀 김정일의 특별지시가 있어서 밀착 집중감시에 들어간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할 정도로 삼엄했고 일본을 떠나는 날까지 경계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26명에 달하는 수행원들이 숙소에서 서로의 방문을 열어놓은 채 호상감시를 하고 있었고, 북과 남, 일본의 정보기관 요원들까지 몰려들어 섣부른 행동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중삼중의 경호도 문제였지만 정치적인 상황도 일본에서의 망명을 어렵게 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북조선 고위인사의 망명을 곤혹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 조미간에 체결된 제네바 합의 이후 조일관계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93년에 중단된 조일 수교교섭을 95년 3월에 다시 재개하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는데, 일본 정부가 조일관계 정상화에 적극적인 반면 조선측은 소극적이여서 교섭이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과 일본은 1997년 8월에야 북경에서 수교교섭을 진행하게 되지만, 두 정부 사이에는 물밑 대화가 오고가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조일관계 정상화에 열의가 있는 일본 정부가 북조선을 자극할만한 일을 꺼려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내외적인 상황 때문에 황장엽은 일본에서의 망명을 포기하고 북경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북경에서 황장엽이 경호원들을 쉽게 따돌릴 수 있었던 리유도 간략하게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당시 황장엽은 ‘북경에서 30만딸라를 주겠다’는 재미동포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밀가루 1만톤을 북조선에 제공하고 싶다는 남조선의 한 목사가 북경에 나와 있었습니다. 황장엽은 이 두 가지 일을 핑계로 북조선 대사관을 나올 수 있었는데 이때 따라붙은 경호원들은 긴장이 많이 풀어진 상태였습니다. 13일 동안 적후인 일본에서 초긴장의 상태로 경호를 했던 이들은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중국에 오자 경계심이 풀렸고, 이날 오후면 평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긴 려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어 경계가 느슨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황장엽은 쉽게 경호원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몇 가지 의문에 대해서 살펴봤으니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겠습니다. 1997년 2월 12일 북경주재 대사관의 주창준 대사로부터 황장엽의 망명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김정일은 즉시 해당한 경로를 통해 정확한 상황을 중국측에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한편, 13일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공식 립장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대변인 : 만일 황장엽 국제담당 비서가 남조선 총령사관에 있다면 그가 적에 의래 랍치됐음이 명백하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지금껏 있어보지 못한 중대사건으로 간주하고, 응당한 대응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날 밤 황장엽이 머물고 있는 남조선 총령사관 주변에 50여 명을 태운 북조선 대사관 차량 10대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이들은 중국 무장경찰의 경계선 밖에서 남조선총령사관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밤새도록 감시했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두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황장엽 회고록, 시대정신

- 황장엽 亡命미스터리!, 월간중앙, 2001년 10월호

- 황장엽 망명/북경서 한국총영사관 찾아, 조선일보, 1997-02-13

- 황장엽 망명­평양에서, 북경까지 조선일보, 1997-02-14

- 14시간만에 "적이 납치" 이례적 신속반응 1997-02-14

- 북 차량 몰려와 밤샘 감시, 조선일보, 199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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