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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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김정일의 첫 번째 녀자 성혜림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평양 생활 22년을 얘기하려면, 먼저 내 리력을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나는 1961년 4월 2일 평양 중구역 대동문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외할아버지 성유경은 선교피복공장 지배인이었고, 외할머니 김원주는 로동신문 국제부장이었다. 외조부모는 아들 일기와 두 딸 혜랑, 혜림을 두었다. 일기 외삼촌은 33년생, 어머니는 35년 생, 혜림 이모는 37년생으로 세 분 모두 남조선 서울에서 출생했다. 나는 6.25때 월북했던 우리 외가쪽에서 낳은 첫 아들이었다.



김원주 : 아이구 우리 손주, 울음 소리도 우렁차구나. (아기 얼르며) '여보! 이 아이 이름을 뭐라 지을까요?'



성유경 : 일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김원주 : 일남이요?



성유경 : '우리가 이곳 평양에 와서 처음으로 낳은 사내아이니 일남이가 맞겠고, 이왕 사내로 태어났으니 조선에서 첫째가는 남자가 되라는 뜻으로 일남이! 거 좋지 않소!'



이리하여 나는 일남이가 되었다. 리일남.



66년 1월에는 여동생 남옥이가 태어났다. 남옥이는 평양외국어학교를 다니다가 김정일의 장남이며 이모의 아들인 정남이와 스위스 제네바로 류학을 간다.



혜림 이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김정일의 가족이 된 것도 이모가 김정일을 만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혜림 이모는 남조선 서울에서 고등중학교를 다니다가 월북했다. 이모는 북조선에서 영화대학을 다녔는데 학생 때인 1959년 <분계선 마을에서>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뽑혔다. 북조선에서 이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 영화는 크게 류행했다. 이모는 <백일홍>이라는 영화의 주인공도 했다.



이모가 주연했던 수많은 영화 중 제일 예쁘고 멋있었다고 생각되는 영화는 <온정령>이다. 당시 북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남자 배우 엄길선과 함께 출연한 영화라 나이 드신 분들은 거의 알고 있을 것이다. 엄길선과 출연했던 <내가 찾은 길>도 유명하다. 배우 박민과 함께 찍은 <인민교원>이란 영화도 있다. 혜림 이모는 1968년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라는 영화를 끝으로 영화계를 떠났다.



나는 이모가 <분계선 마을에서>를 주연할 당시 소설가 리기영의 첫째 아들 리평과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리평은 이모가 영화대학 다닐 때부터 눈독을 들였던 것 같다. 리평은 당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자기 아버지의 세력을 리용해 이모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모의 보좌관이었던 최준덕은, 이모가 영화대학을 졸업할 즈음 리평이 거의 랍치하다시피 이모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해설 : 남로당 출신으로 미래가 불투명했던 성혜림의 부모는 리기영의 집에서 여러차례 결혼 요청이 들어오자 결국 수락을 했다. 이때의 상황을 성혜림의 언니 혜랑은 자신의 수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성혜랑 : 세상 사는 리치를 나보다 더 잘 아실 테지만, 솔직히 따지면 아버지 어머니는 지쳐 있고 앞날에 자신이 없어 어차피 시집을 보낼 딸인데 ‘든든한 집’에 시집을 보내는 게 낫다고 작정을 하신 것 같았다.” (중략) “나의 부모가 결혼을 수락한 것은 리기영이 고정한 사람이라는데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혜림 이모는 리평과의 사이에서 옥돌누나를 낳았다. 옥돌누나와 혜림이모가 20년 차이가 나니 대학시절인 20살에 옥돌누이를 낳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자식까지 낳았지만 반강제적인 결혼이라 리평과의 생활은 순탄치 못했던 것 같다.



일부 남조선 언론은 김정일이 결혼 생활 중인 이모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랍치하다시피 데리고 와서 살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 같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최준덕 등 당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인데다, 또 그것이 원인이 되어 혜림 이모는 더욱 영화에 몰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지방촬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부부관계는 계속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모는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끝내면서 첫남편 리평과 리혼했다. 내 생각으로는 그때부터 영화에 출연은 않고 김정일과 연애를 시작한 것 같다.



우리 가족이 69년 문화인 아빠트로 이사갔을 때, 리평 이모부가 집에 여러 번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혜림이모를 잊지 못하고 있던 그가 나의 어머니에게 이모의 행방이라도 알려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말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해설 : 성혜랑에 따르면, 60년대 말 촬영소에 자주 나와서 영화를 지도하던 김정일이 성혜림를 포착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성혜림에게 호의, 관심을 갖다가 결국 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성혜림과 살기 위해 리혼 수속을 시켰다. 이것이 성혜림 가족의 비극의 시작이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김정일과 연애할 때 이모는 33세였고, 김정일은 28세였다. 나중에 내가 모스크바에 류학할 때 방학이 되여 잠시 집에 오게 되였는데, 그때 우연히 이모랑 김정일의 연애시절 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 사진들은 트렁크에 열쇠로 잠겨진채 보관되여 있었는데 사진을 보면 이모는 나이가 많았지만 처녀처럼 예뻤다. 또 지방에 있는 김일성 특각들을 다니며 연애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진에는 김정일과 이모만 있는 게 아니라 남녀 한 쌍이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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