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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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31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김정일이 권력을 잡으면서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신격화를 다지자, 김일성의 마음도 달라져갔습니다. 선전은 점잖게 하는 게 좋다...라고 얘기하던 김일성은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를 호화롭게 꾸미기 시작했고 자신의 빨치산 투쟁경력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특히 경제건설에서 허풍이 심했는데, 가능성이 희박한 목표를 세워놓고 외국손님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대학도 내실 있게 운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학 숫자만 늘리려고 했다. 그러면서 해방 전에는 대학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몇 개로 늘어났냐면서 자랑하는 것이었다. 신격화 수준이 높아갈수록 김일성의 자화자찬 수준도 높아졌다. 전에는 후처인 김성애가 대학에 따라나와 김일성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하면 들었는데, 나중에는 김성애를 대하는 태도도 점차 달라졌다.



1974년 2월 19일, 김정일은 김일성의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체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이론·방법의 전일적(全一的) 체계라는 것을 정식화했다. 물론 그 속에 철학적인 내용은 없었다. 김정일이 이 글을 발표한 목적은 아마도 김일성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레닌도 ‘레닌주의’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며, 스탈린이나 마오쩌둥도 ‘스탈린주의’나 ‘마오쩌둥주의’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사실상 마르크스는 자신의 고유한 철학체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독창적인 사상체계라고 볼 수 있지만, 레닌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등은 정치적인 전략전술 면에서만 자기 견해를 내놓았지 철학적인 원리 면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레닌은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함께 이론을 처음으로 실천한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으나, 스탈린은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명예를 지닐 권리가 없다.



그런데 김일성이 역사발전에 무엇을 기여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김일성주의’를 제창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아직 마오쩌둥이 살아 있을 때였다.



나는 물론 주체철학을 완성하여 김일성을 세계혁명의 불멸의 지도자로 만들고 싶은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김정일에게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경제대국이나 군사대국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려면 엄청난 국력이 소모될 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적습니다. 그러니 주체사상을 발전시켜 사상의 대국이 되어 인류역사 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하고 또 김일성이 이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상식을 초월한 주관주의에 빠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김정일의 김일성주의 선포를 환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의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의 필독문헌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노작 다음에 김일성의 노작이 올랐다.



나는 이미 1960년대 말에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인간중심의 철학을 창립했으나,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대학에 돌아와서도 함구무언(緘口無言)하고 내 이론을 선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라고 선포하게 되자, 한편으로는 나에게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철학을 선전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대학에서 주체철학을 조금씩이나마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김영춘이나 이국선을 철학연구에 끌어들이게 된 것도 김정일이 김일성주의를 선포함으로써 가능했다.



김영춘과 이국선은 나의 이론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수재들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도움을 얻어가며 많은 글을 썼다. 게다가 연구분야를 경제학으로도 넓혀,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의 일면성을 시정하고 인간중심의 가치법칙을 밝히려고 했다. 이때부터 중앙당 비서들도 이론문제에 의문이 들거나 걸리는 게 있으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그즈음 김일성의 고종사촌 동생인 김용원이 선전부에서 당 역사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그 대신 선전부 이론선전과장이 된 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새롭게 주체철학이 발견되고 김정일 동지가 김일성주의를 제창하셨으니 새로운 철학교과서를 써야 하는데, 의장 동무께서 이 사업을 좀 지도해 주셔야겠습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오.”



나는 교과서를 다시 쓰기에는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있었다. 또 손도 모자랐다. 김대에는 김영춘과 이국선이 전부였고 그 밖의 학자들은 주체사상에 대해 우리에게 듣거나 발표된 문건을 읽은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9월 17일자 김일성 명의로 발표된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 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와 1974년 2월 19일자 명의로 발표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만을 지침으로 하여 철학교과서를 집필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또 내가 직접 쓴다고 해도 그 이론이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되기 전에는 쓸데없는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되어 교과서 집필은 시기상조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론선전과장은 새로운 철학교과서를 쓰기로 한 것이 마치 당의 방침인 것처럼 말했다. 그의 말은 김정일이 승인을 했으니 곧 당의 방침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잔말 말고 교과서 집필을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나도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대와 사회과학원에서 각각 5명씩의 학자를 선정해 철학교과서를 저술하도록 했다. 김대의 학자들은 내 이론을 지지하는 편이었으나, 사회과학원에서는 한 명이 김대 편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중립이었으며, 나머지 세 명은 마르크스주의를 고집했다. 이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일은 안 하고 논쟁으로 시간을 보냈다. 결국 새 철학교과서 편찬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은 나에게 초고도 가져오지 못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31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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