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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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21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쏘련과 화해해야 한다는 류소기와 등소평, 그리고 좌경로선을 강하게 고수하던 모택동간의 갈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모택동은 홍위병과 4인방을 중심으로 대중을 선동해 류소기와 등소평을 수정주의자로 몰아붙이고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는데, 김일성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소련의 ‘우경 수정주의’와 중국의 ‘좌경 모험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자주적인 혁명노선을 견지한다면서 주체를 더욱 강조했다.



그리하여 1966년 당 대표자 회의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그릇된 노선을 반대하는 노동당의 주체적 노선을 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회의에서 참가자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발언을 했으며,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뽑혔다.



하지만 나의 이런 성공을 질투라도 하듯이 큰 사건이 터져 난생 처음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66년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20돌이 되는 해였다. 김일성과 당의 주요간부들이 모두 참석하여 20돌 행사를 치렀는데, 김일성은 자리를 쉬 뜨지 않고 대학의 문예서클 공연까지 보는 관심을 보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일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창립 20돌 기념논문집에 실린 내 논문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논문은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를 다룬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글이었다.



내가 이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이러했다. 나는 7년간이나 대학강단을 떠나 중앙당에서 근무하다가 총장이 되어 돌아왔다. 대학에 돌아와 옛 동료들을 만나보고는 그들과 나 사이에 정치수준이나 과학이론 수준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서기실에는 내외 정세자료가 집중되고 공부할 시간도 많아 교수보다 조건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옛 동료들은 내가 총장으로 부임하자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배운다는 자세로 나를 대했고, 이구동성으로 20돌을 경축하는 논문집에 논문을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다.



논문의 내용을 기억하면 이렇다. 소련공산당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수립되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고도기는 끝난다고 한다. 이때부터 프롤레타리아독재 역시 약화되며 국가는 점차 조락(凋落)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에서 말하는 과도기는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 이상사회가 실현될 때까지 지속되며, 그때까지 계급투쟁도 계속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독재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도기의 종식은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수립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에 상응한 사회주의적 생산력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제도가 자체의 우월성을 충분히 발양(發揚)할 수 있게 될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북이 분단되어 대립하고 있는 조건에서 조국이 통일될 때에야 과도기가 끝나며, 그때까지는 남북 간의 계급투쟁이 계속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독재 정권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회발전에서의 인텔리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면서, 인텔리들을 그 출신성분과 결부시켜 활동의 진보성 여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가 사회발전에 기여한 결과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문이 발표되자 김대에서는 독창적인 견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김일성의 고종사촌 매부 양형섭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당시 김영주는 당의 조직부장으로서 사실상 북한 내 2인자였고, 양형섭은 중앙당학교 교장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규모 면에서나 학자의 지명도에서 중앙당학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월등했지만, 중앙당학교는 중앙당 직속이라는 것을 내세어 김일성종합대학과 경쟁하려고 했다.



김영주는 모스크바종합대학 법학부 출신이고, 양형섭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하고 연구원을 졸업했다. 두 사람은 내 논문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약화시키는 반당적(反黨的) 수정주의 글이라고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김영주는 나에게 악감정은 없었으나 평소의 자기 주장과 다른 글을 썼다는 데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정적(政敵)인 남로당파와 소련파, 연안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일찍이 빨치산과 연대해 국내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갑산파를 몰아내던 중이었다. 그중에는 김영주의 측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무렵에 김정일은 벌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그가 삼촌인 김영주를 포함하여 김일성의 측근들까지 제거하는 일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첨의 기본은 아첨해야 할 사람의 적수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서 그 적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김정일은 그 방법을 썼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가장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김일성의 측근 중에서 미리부터 점찍었던 사람들을 충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혹은 사상을, 혹은 무능을 구실로 가차없이 공격하여 제거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김일성의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 김정일과는 나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일은 참으로 이상하게 꼬여갔다. 논문사건은 이론문제인 만큼 나와 김영주 간의 대립을 김정일이 동시에 흔들어서 김일성의 이론적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나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진행시켰다. 그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를 비방하고 자신만이 대립된 두 이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이론을 내놓을 수 있는 이론의 대가인 것처럼 자처하면서 논쟁문제에 대한 결론을 일방적으로 내렸다.



이것이 1967년 5월 25일 소위 ‘5·25 교시’라는 것이다. 결국 나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던 서기실 동료들은 모두 쫓겨났다. 나도 지방으로 추방될 것을 각오하고 짐을 싸놓았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21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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