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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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4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58년 11월, 황장엽은 김일성을 수행하여 중국과 윁남을 방문합니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북경에 도착한 김일성과 대표단 일행은 모택동을 만나기 위해 무안으로 떠나고, 서기실장과 황장엽은 연설문을 다듬기위해 숙소에 남았습니다.







다음날 김일성이 돌아와 말했다.



“마오쩌둥을 만났는데, 중국에서는 앞으로 경지면적을 3분의 1로 줄이고 나머지는 목장과 공원을 조성한다고 하는군. 3분의 1에만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남아돈다는 거야.”



우리는 다음날 저우언라이 총리의 안내로 무한의 어느 인민공사를 방문했다. 도중에 목화밭을 지날 때였다. 김일성이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수행하는 인민공사 사장에게 목화를 1정보당 얼마나 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장이 15톤을 딴다고 대답했다. 또 밀밭에서는 1정보당 70톤을 수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3톤을 겨우 수확하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전국에서 올해 5억 톤의 양곡을 생산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베트남으로 갔다. 베트남에서 받은 첫 인상은 호치민이 매우 소탈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팜반동 수상도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나는 1996년에 베트남을 세 번째 방문하여 아흔이 넘어 앞을 못보는 그를 만났었다.) 김일성은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을 소개하면서 무료의무교육제(7년제)와 무상치료제를 자랑했다. 그러자 호치민이 농담조로 말했다.



“다른 데 가서는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인민들이 호치민이는 뭘 하고 있는가 하면서 나를 쫓아낼 수도 있소.”



며칠 후 우리는 귀국했다. 김일성은 당 중앙위원회에 방문결과를 보고했다. 국가계획위원장인 이종옥을 비롯한 많은 간부들이 우리도 중국식 경작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경험을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정 해보고 싶으면 중앙당에서부터 시험적으로 해보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전국에 적용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으오.”



다음해 봄, 중앙당에서는 평양에서 약 20㎞쯤 떨어진 중화라는 곳에 시험재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비료를 듬뿍 주고 깊이 갈아 밀식했는데 400톤이 아니라 4톤도 나지 않았다. 그해 북한은 천리마운동으로 인해 공업은 크게 발전했으나 농업은 형편없었다.



그 이듬해 가을, 중국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교포가 평양의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중국의 1958년 양곡 총생산고는 5억 톤이 아니라 1억 8천만 톤이라면서 식량이 모자라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의문



1959년 1월 나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당시 김정일은 고급중학교 졸업반이었는데 우리와 동행했다. 나는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을 따라 중앙당 청사에 나오는 것을 몇 차례 본 적은 있어도 직접 만나보기는 처음이었다.



김정일은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온 것을 알고는 특별히 호감을 갖고 대했고, 나 역시 그를 지도자의 아들로서 따뜻하게 대하면서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김정일은 영리하고 호기심이 많아 나에게 대학의 학과내용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왔다. 내가 철학전문가로서 사회과학이나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상식이 있다 보니 그의 질문을 대체로 만족시켜 준 것 같았다.



그는 공식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숙소에 남아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는 내게도 남아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도 가능하면 그와 함께 남아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와 얘기를 하면서 받은 인상은 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권에 대한 욕망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잘 모시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아침마다 자기 아버지가 나갈 때 부축을 하고 나서는가 하면, 신발을 신겨주기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47세로 원기왕성하여 부축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들의 부축을 받을 때면 마냥 흡족해했다.



저녁에 김일성이 돌아오면, 김정일은 부관들과 의사, 간호원 등 수행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고 이런저런 지시를 하곤 했다. 김일성을 수행한 대표단 중에는 정치국원들도 많았는데,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업을 직접 관장하고 부관들과 수행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일을 지시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행동이었다.



나는 그때 어쩌면 이 소년이 자기 삼촌을 내쫓고 권력을 승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루는 김정일이 소련의 공업농업전람관을 가보자고 해서 그를 데리고 갔는데, 기술적인 문제를 자꾸 질문하여 통역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나는 웬 기술에 그리 관심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모스크바종합대학도 가보고 싶어하여 안내를 했는데, 같이 간 소련공산당 조선담당 과장이 김정일에게 아부를 한답시고 한마디했다.



“동무도 고급중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공부하시겠지요?”



그러자 김정일이 발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할 겁니다.”



김정일은 성미가 매우 급한 편이었다. 또 아랫사람에게 지시할 때는 상당히 엄격했다. 깊이 사고하는 형이 아니고, 감각이 예민하며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959년부터 중소(中蘇) 이데올로기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서기실에서는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해 봄, 나는 김일성의 지시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며 형식상으로 국가수반인 최용건을 수행하여 사회주의 나라를 순방하게 되었다. 홍명희 부수상, 강양욱 최고인민회의 서기장도 동행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4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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