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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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3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58년, 북조선은 농업협동화를 끝내고 사회주의 경제제도 수립이 나름대로 완성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또 정치적으로는 김일성 일인 독재체제가 확립되어 김일성의 말 한마디에 모든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인민들의 생활도 눈에 띄게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합니까? 황장엽은 만약 김일성이 1958년부터 10년만 집권하고 물러났더라면 지금 100만 명씩 굶어 죽은 사태는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내가 중앙당 서기가 된 1958년, 김일성은 46세였다. 김일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잤는데, 대신에 오침(午寢)을 하루 1~2시간씩 했다. 그때만 해도 김일성에게는 별장이 없어 현지지도를 나가면 서기들도 그와 함께 기차 안에서 숙식을 했다.



이른 새벽 잠결에 구둣발 소리를 듣고 내다보면 김일성이 부관과 함께 플랫폼에서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달려 나가곤 했다. 김일성은 매우 건강하여 많은 곳으로 현지지도를 나갔다. 오히려 서기들이 문건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질 정도로 김일성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김일성은 매주 한 차례 정치국 회의를 열고 필요한 간부들만 참석시켰는데, 우리 서기들은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했다. 정치국 회의에서 한 속기록이나 녹음자료는 주요기밀을 다루는 부서인 기요과에서 서기실로 보내 주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잘 정리하여 김일성에게 올렸다가 결재가 나면 정식문건으로 발표했다.



김일성의 반대파들은 그가 소련이나 중국, 동유럽 등에서 받은 원조를 인민생활의 향상에 쓰지 않고 중공업건설에 쓴다고 이구동성으로 몰아붙였지만 김일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중공업을 발전시키지 않고는 자립경제를 이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반대파들의 이견을 반박하고는 했다.



김일성의 중공업정책에 따라 1958년 북한은 자체 힘으로 28마력짜리 트랙터를 생산했고 화물자동차도 생산했다. 그해 여름 평안북도와 자강도, 양강도 일대를 김일성의 현지지도에 동행하여 둘러봤더니 군수공장들이 이미 지하에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연설문이나 그 밖의 글들을 쓰면서 교과서를 쓸 때와는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그때만 해도 글이라면 어지간히 써본 나였지만 익숙해질 때까지는 상당한 고충을 겪어야 했다. 서기실에 부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 4월 어느 날, 나에게 김일성이 사법검찰들 앞에서 연설할 초안을 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실장의 도움을 받으면서 연설문을 작성해 올렸는데, 김일성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원고 없이 연설을 했다. 나는 첫 시험에서 탈락했다고 낙심했다.



그런데 그 원고 없이 한 연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내 생각들을 덧붙여 완성해 올렸다. 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는지 김일성은 잘 정리했다고 평가해 주었다. 이 연설문은 나중에 김일성의 저작선집에 실렸다. 그래도 정치논리에 익숙하지 않아 연설문을 작성하는 데는 다른 서기들보다 뒤떨어졌다. 더구나 김일성은 대체로 경제문제에 대한 연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주로 경제전문 서기들이 초고를 작성했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적은 편이었다. 덕분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철학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다른 서기들은 일요일이면 사냥을 가거나 놀러다녔지만, 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발전시킬 뚜렷한 목적으로 계속 철학에 매달렸다.



서기들은 정치국원들에게 철학 강의와 경제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에서는 김일성과 최용건만 참가하지 않았을 뿐 모든 간부들이 참가했다. 경제 강의는 서기실장이 하고, 나는 철학 강의를 맡았다. 나는 스스로 내 수준이 꽤 높아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마르크스의 어려운 저서를 읽는 한편 유학시절의 강의노트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환상은 계속 남아 있었고, 소련유학시절 강좌장의 특강내용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1958년 11월, 나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서기실장과 함께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했다. 나로서는 베트남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본토 방문도 처음이었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김일성을 마중하기 위해 간부들이 단둥까지 나와 있었다. 간부들 가운데는 외교계에서 일하는 조선동포도 섞여 있었다.



11월 말경인데도 밭에 추수하지 않은 옥수수와 수수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내가 물어보았다.



“왜 저 옥수수와 수수는 추수하지 않습니까?”



“아, 저거 말입니까? 저것들은 추수를 하나마나입니다. 내년부터는 1정보에서 200톤 내지 600톤의 소출을 내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추수를 서두르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심경밀식(深耕密植: 깊이 갈고 빽빽이 심는다는 뜻)의 방법으로 엄청난 수확을 올릴 수 있다고 떠들어댔다. 우리가 중국으로 향하기 전에 중앙당에서도 소문이 돌기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것에 비할 데 없이 큰 사변이라고들 했다. 그들은 벼를 빽빽이 심은 논의 벼이삭 위에 아이가 올라앉아 있는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열차가 산해관을 지나자 밤이 깊어졌다. 그런데 철길 옆으로 불빛이 이어졌다.



“저 불빛은 뭡니까?”



동행한 중국관리가 대답했다.



“예, 저건 토법(土法: 재래식이라는 뜻)으로 강철을 생산하는 불빛입니다. 우리 중국은 앞으로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대약진을 하고 있습니다. 강철도 전체 인민이 현대식 용광로를 쓰지 않고 저렇게 재래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베이징 역에 도착하자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롯해 중국의 당과 국가 간부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오쩌둥이 무한에 있다고 해서 우리 일행은 곧장 무한으로 출발했다. 무한에 도착한 다음 김일성과 대표단 일행은 마오쩌둥과 회담하기 위해 떠났고, 서기실장과 나는 숙소에서 연설문을 다듬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3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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