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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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2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황장엽의 둘째누이는 전쟁 때 월남한 매부 탓에 생활이 곤란했습니다. 월남자가족이라는 리유로 누이는 물론, 그녀의 딸들도 많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황장엽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조카를 돌봐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큰조카는 부기원 양성소를 1등으로 졸업할 만큼 매우 똑똑한 아이였지만, 정의감이 강하고 너무 원칙적이어서 관리위원장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관리위원장의 부정행위를 그냥 눈감아주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일단 질녀를 타일렀다.



“네가 아무리 옳아도 관리위원장과 정면대결을 해서는 불리하다. 또 그래서도 안 되고. 주변에 돕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없을 게 뻔할 테니 정면대결은 피하고 좀 참고 기다려라. 그럼 차츰 나아지겠지.”



질녀는 울면서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계속 관리위원장에게 힘겹게 맞서다가 그만 정신이 돌고 말았다.



누이 얘기를 해주었던 조직부 부부장이 찾아와, 공연히 쓸데없는 문제로 아랫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면 이쪽이 불리할 수도 있으니 누이를 다른 지방으로 옮기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결국 나는 누이를 양강도로 옮겨 살게 했다. 누이를 보낼 때는 황 비서가 이번엔 누이 때문에 직책에서 해임되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1년이 지나자 누이가 나를 찾아왔다. 통행증이 없으면 평양에 올 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그곳에서 김일성대학에 다니는 학생한테서 내가 계속 중앙당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학생의 도움을 받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누이를 보자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직부 부부장을 찾아가 사정을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순천시에 집을 하나 얻어주고 그리로 보냅시다.”



처음부터 누이의 일에 개입되었던 그는 나를 좋게 보기도 했던 터라 선선히 내 부탁을 들어 주었다.



누이는 순천시로 이사를 가서 살다가 1996년에 죽었다. 나는 가보고 싶었으나 김일성의 탈상이 끝나지 않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를 보냈다. 질녀의 정신병은 그때까지도 고치지 못한 상태였다.



미친 질녀도 그럭저럭 나이 예순이 다 되었는데, 지금도 때때로 정신이 돌아오면 외삼촌이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는 걸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애가 일생을 망치도록 방관한 잘못을 뼈저리게 느낀다.



내가 누이를 보호하지 못한 것을 계급투쟁 이론 때문이라고 하면 배부른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너무도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적 이익이 최상의 이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부모자식 간이나 형제자매 간의 관계를 갈라놓고 민족을 분열시켜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자기 의지대로 월남한 것이 아내에게 무슨 죄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있다고 해도 그 남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으로써 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더 유력한 도적질로 도적을 없애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논리다. 도적은 없어질지 몰라도 도적질하려는 마음, 도적놈의 근성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욱 강화될 게 뻔한 일이다. 북한 통치자들은 계급적 입장, 계급적 관점에서 모든 사물을 대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무의식적인 계급사회보다 더 무서운 의식화된 계급사회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김일성 일인 독재체제 확립



1958년은 북한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북한은 농업협동화를 끝내고 사회주의 경제제도 수립이 나름대로 완성되었다고 선포했다. 또 정치적으로는 국내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소련파, 연안파를 숙청하여 김일성의 일인 독재체제가 확립되어 김일성의 말 한마디에 모든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인민들의 생활도 전쟁 직후보다는 눈에 띄게 나아졌다. 만일 김일성이 1958년부터 10년간만 집권하고 물러났더라면 지금처럼 인민이 연간 100만 명씩 굶어 죽는 사태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6·25 전쟁을 일으켰다든가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겠지만 보다 큰 원인은 스탈린주의의 잘못,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이론의 잘못이라고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계급투쟁의 원리에 따르면 계급적인 적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을 갈라놓고 정의의 전쟁은 빨리 할수록 좋다고 주장했다.



당시 나는 김일성이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벌인 것만 가지고도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 내가 삼척에서 징용살이를 하면서 김일성 장군의 독립투쟁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이 비록 과도하게 포장된 풍설이라 할지라도 그가 이끄는 민족의 군대를 한번 보기만 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해방 후에 김일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북의 김일성이 빨치산에 가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진짜 김일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대단한 존재도 아니며, 또 허명일 수도 있다. 그러니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떻단 말인가.’



김일성만이 아니라 빨치산 출신들은 비록 무식했지만 나는 그들의 용기를 존경했다. 그리하여 나는 최용건, 김일, 임춘추, 오진우, 백학림 등을 비롯한 모든 빨치산 출신 간부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2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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