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0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남로당파와 연안파의 숙청, 이는 1950년대 중반, 중앙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인텔리들이 희생되었고, 황장엽의 친구인 송한혁도 그 희생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송한혁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7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송한혁은 집으로 가기도 전에 배낭을 멘 채 황장엽을 찾아갔습니다.





“어디로 배치되었어?”



“평양시 서구역 인민위원회 상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어.”



그와 같은 수재가 구역의 상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그를 돌려보내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교육성에 찾아가 송한혁의 배치를 재고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상업대학교 학장을 찾아가 송의 뛰어난 재능을 설명하면서 그를 상업대학교 교원으로 채용해주도록 간청하자, 학장은 못 이기는 체하며 들어 주었다.



상업대학교에 배치된 송한혁은 한동안 말썽 없이 근무했다. 그런데 1956년 8월, 앞에서 설명한 전원회의 이후 소련파와 연안파가 김일성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숙청당하자, 당은 독재를 더욱 강화하면서 지식인의 출신성분을 다시 엄격히 따지게 되었다. 송은 그리 부유한 집안 태생은 아니었으나 일본군에 학도지원병으로 나갔다는 것과, 형이 월남하여 남한에 있다는 것 등이 문제가 되어 결국 평안북도 피현군에 있는 상업일꾼 양성소 교원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가 농촌으로 가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때 나는 중앙당에 들어가 있었지만 지방에 가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까운 인재 하나가 정치놀음에 희생된 것이었다.



송한혁에게서 나는 사람이 재능만 있고 선량하다고 하여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배웠다. 그것은 창조성보다도 자주성이 강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이었다. 도쿄에서 그를 만났을 때, 나는 학도지원병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당장의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학도지원병으로 나갔으며, 김일성대학 연구원으로 있을 때도 돌아가지 말아야 할 경제전문학교로 돌아갔다. 또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말렸으나 아버지가 원한다면서 기어코 결혼을 했다.



송은 천성이 너무도 착하여 학창시절부터 선생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상업학교 시절 일본인 선생이 신궁참배를 하고 오라면 개별적으로 하고 온 것만 봐도 그랬다. 나는 그를 보면서 후대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것은 지식교육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불굴의 투지와 자주정신을 길러주어 스스로 자기 목표를 관철해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4.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체사상으로



중앙당 비서실



1958년 1월 3일부터 나는 중앙당 서기실 이론서기라는 직책으로 중앙당에 출근했다.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 시절에 비서실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하여 자신의 이론서기들을 비서라고 칭하고 그 기구 조직을 비서실이라고 불렀다. 이론서기들의 대우는 부부장급이었다.



비서실은 김일성이 당사업을 주도하면서부터 생겼다고 했다. 내가 이론서기로 들어가자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소련유학 출신이 비서실장을 맡고 있었다. 실장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한 명은 김일성대학 연구원을 나온 자로 중학교 4학년 때 일본 제3고등학교(교토)에 입학했다는 소문난 수재였다. 다른 한 명은 해방 전 서울대학을 졸업한,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인정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이들의 전공은 모두 경제학이었다. 그런데도 글을 잘 썼다. 특히 실장은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글을 구사하는 재사였다.



중앙당의 비서가 되면서 내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처음으로 승용차를 타고 정부 특별병원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고급 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김일성 당 총비서(당시 당위원장)를 보좌하기 때문에 중앙당 각 부서에서는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에 가끔 우리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부탁하는 일은 가능한 한 들어주려고 애썼다. 거기다 저녁식사는 경리부에서 무료로 처리해 줄 정도였다.



아내는 사범대학 졸업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연극영화대학에서 노어를 가르쳤다. 아무런 걱정 없이 유복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혼자 사는 생모를 모시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니, 장모는 어머니가 아니오. 어서 모셔옵시다.”



장모는 장인과 이혼하고 재가했는데 그 남편도 이미 세상을 떴다고 했다. 장모는 재가하여 낳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래서 처제와 처남이 생긴 셈이었는데, 나는 처제를 의과대학을 입학시키고 처남은 기술학원에 보내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당시 중앙위원회에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부장, 부부장, 과장, 지도원이 있었다. 그러다가 훗날 중앙당위원장이 총비서가 되고 부위원장들이 비서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수(黨首)의 서기로서의 비서와, 당 중앙지도기관의 구성원으로서의 비서가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내가 몸담은 비서실을 ‘서기실’이라 하고 비서를 ‘서기’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론서기 외에 기술서기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총비서인 김일성을 수행하면서 개별적인 심부름을 주로 하는 수행비서였다.



김일성은 우리 서기들을 매우 아꼈으며 정치국 회의를 비롯한 모든 중요 회의에 참석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주도하는 회의와 현지지도를 하는 곳에도 동행하게 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0부를 마칩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