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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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9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남로당파에 대한 숙청의 회오리가 끝난 북조선은 곧바로 쏘련파 숙청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1956년, 쏘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딸린의 개인숭배가 비판당하자 김일성이 불안감을 느낀 것입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은 쏘련계 조선인이었고, 대학 간부 여럿은 연안파 계열이었습니다. 때문에 대학에서는 황장엽에게 큰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나는 그 어느 파벌에도 가담한 일이 없고 경력도 단순한데다 김영주를 비롯한 많은 당내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또 총장이나 당비서도 대학 당부위원장인 나를 의식하며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때로 중앙당에서 나온 사람들은 나에게 대학의 실정을 물어보고는 총장이나 당위원장에게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고 가기도 했다. 나는 당으로는 대학 당부위원장이었고 행정직책으로는 철학 강좌장일 뿐만 아니라 대학 과학연구부장이었다. 과학연구부장은 연구원장과 함께 대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직책이었다. 당시는 부총장 직책이 없던 때여서 전체적으로 보면 나는 총장과 당위원장 다음가는 힘 있는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컸다. 스탈린의 개인숭배 비판은 나로서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철학이나 경제학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학이나 생물학에까지 스탈린의 영향이 막강한 여건에서, 철학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개인숭배가 단결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학문이나 연구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게 그때의 내 믿음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기치 아래 모든 것을 정치투쟁에 복종시키고 있었다. 나로서도 이렇게 나가다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의 도구로 전락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이 정도의 권한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대학에서 내 지위를 유지할 수 없고, 또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문제에도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정치에서 도피하는 것이 유리한가 불리한가 하는 문제를 곰곰이 따져보다가, 중앙당학교로 가라고 하던 당 간부부의 권고를 듣지 않고 김일성대학으로 온 것이 문득 후회되기도 했다.



남로당파는 숙청되었으나, 소련파와 연안파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소련당의 개인숭배 비판 노선을 등에 업고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대학 내에서도 용기 있는 사람들은 비판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학자들 중에는 숙청당한 남로당을 동정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꽤 많은 연안파 계열 학자들도 비판하는 쪽에 섰다.



김두봉이 연안파를 대표했다. 그는 언어학자로서 학자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자연히 김일성을 반대하는 소련파인 박창옥과 연안파인 최창익 간의 연합세력과 연계를 갖게 되었다. 당 중앙검열위원회에서는 수시로 대학에 나와 학자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들은 학교에 나와서는 나를 꼭 만나보고 갔는데, 총장이나 당비서의 동향에 대해서도 은밀히 파악하려고 들었다. 나는 그때 복잡한 정치투쟁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또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하나같이 모른다고 대답했다.



1956년 8월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의 최창익이 이끄는 연합세력이 김일성을 정면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살벌한 기운이 북한 전역을 감도는 가운데 연안파이자 상업상인 윤공흠과 직업동맹위원장 서휘, 김일성종합대학 대학 당위원장 홍락응 등이 중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학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사상검토 회의로 들끓었다. 이 사상검토로 많은 학자들이 희생당했다. 은밀히 도는 소문에 따르면 김일성대학 교수들 가운데 김일성을 반대하는 선언문을 쓴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상검토를 거치지도 않고 비밀경찰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평양경제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심재윤 선생은 숙청 회오리가 한창일 때 김일성대학 통신학부를 맡고 있었다. 그는 연안파의 최창익이 체포되자 최창익은 나쁜 놈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에서는 그가 연안에서 활동한 종파분자이고 또 연안에 가기 전에는 일본에서 ‘일월회’라는 종파단체에 소속되었다는 것과, 그의 동료들이 대부분 종파분자라는 점을 들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를 맹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은 나에게도 그와 관계를 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그는 인정에 이끌려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나는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추락이 임박함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내 힘으로는 도울 수 없었다. 그는 평안북도로 쫓겨갔는데, 그 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때 그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아마도 쉰이 넘었던 것 같다.



여기서 내 친구인 송한혁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 이는 1950년대 중반의 권력다툼으로 희생된 한 인텔리의 얘기도 되기 때문이다.



대학과 함께 백송리에서 평양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송한혁이 제대해 집으로 가기도 전에 배낭을 멘 채 나를 찾아왔다.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김대 연구원에서 1개월 정도 있다가 다시 경제전문학교로 돌아갔었다.



그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후퇴하다가 숙천군에서 국군 낙하산병들에게 잡혀 탄약을 날라주게 되었다. 후퇴했던 인민군대가 중국 지원군과 함께 다시 진격해올 때 인민군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복당(復黨)을 하기 위해서였다. 부역에 대한 부담으로 그는 7년간 인민군에서 복무한 다음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9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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