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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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52년 5월, 황장엽은 50년 가까이 고락을 함께하게 될 아내 박승옥을 만납니다. 활달하고 솔직한 성격을 가진 그녀는 로씨야 사람들과 교섭도 잘하고 흥정도 잘하는 능력이 출중한 여자였습니다. 정치적인 지위보다는 학문적인 권위와 사람됨을 더 귀중히 여기는 여자였습니다. 1952년 여름, 황장엽과 박승옥의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박승옥은 나의 진심을 알게 되자 자기 운명을 내게 온전히 맡겨왔다. 나는 그 무렵 자만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학습에서 어느 정도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학생위원장으로서 유학생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면서, 평양을 떠날 때 가졌던 비장한 결심도 느슨해져 있었다. 게다가 대체로 성관계가 자유로운 곳이어서 나와 박승옥은 깊은 관계를 맺고 말았다.



우리 둘의 관계가 유학생들 사이에 알려지자 아내는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결혼하여 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사관의 당비서는 마침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떠날 때 대학 당위원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만큼, 우리 둘의 처지를 알고는 도와주려고 했다. 그는 우리 둘을 불러놓고는, 나는 1년 후면 귀국해야 하고 박승옥은 아직도 4~5년을 더 공부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가 평양으로 떠날 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어떠한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어쩌면 50년 뒤에 겪을 이 고통을 그때 이미 앞질러 맛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 헤어진 뒤로 학업에 전념했다. 그 시기에 ‘인식에서 실천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학위논문 초고를 끝내고 있었기 때문에 논문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안 하고 있었으나, 몇 가지 이론문제가 풀리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그즈음 소련학계에서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학위논문을 핑계 삼아 학생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건의를 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헤겔 변증법에 빠져들었다. 헤겔의 『논리학』은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다 이해된다면서 해설서를 쓰고 있었는데, 나는 해설된 책의 도움을 받으면서 읽어도 이해를 못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철학적 사고의 재능도 없으면서 공연히 철학연구에 뜻을 둔 게 아닌가 하고 은근히 두려움이 생겼다.



풀리지 않는 것 중의 또 한 가지는 철학 강좌장의 특강내용이었다. 연구원 2년과정이 끝나갈 무렵에 강좌장이 여러 시간에 걸쳐 특강을 했는데, 나는 겨우 절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노트를 해놓았지만 그걸 다시 읽어보아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후배 연구원들을 위한 강좌장의 특강을 처음부터 다시 들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기는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학위논문에서 내가 또 염두에 둔 것은 이론과 실천을 어떻게 통일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강좌장은 실제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또 그의 성격이 변태적인 듯하여 평소에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서운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아갔다.



“조선에 나가서 철학연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될까요?”



나는 특강에 대한 그의 주장을 묻지 않고 우회하여 그렇게 물었다. 그의 철학적 사고에 깊이가 있다면 천천히 의논할 작정이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공부하는 게 좋겠지요. 하다못해 『자본론』 1권만이라도 잘 연구할 필요가 있어요.”



나는 이 사람에게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미련 없이 그와 작별했다.



학위논문이 통과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논문개요를 심사위원들에게 돌리고 도서관에도 비치해야만 했다. 그 일을 하려면 우선 지도교수의 서명을 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논문개요를 작성하여 오랜만에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논문개요를 읽어보더니 두어 글자 고쳐주고는 말했다.



“내가 지도한 연구생 가운데 논문개요를 무수정으로 통과시킨 예는 당신이 처음이오. 당신 논문은 독창적인 사상을 담고 있소.”



나는 지도교수가 그때까지 전혀 지도를 해주지 않다가 미안한 나머지 과찬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논문의 개요가 간결하여 산뜻한지는 몰라도 논문 자체는 소련학자들이 발표한 논문들의 사상을 여기저기서 따다가 조립한 것에 불과하고,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내 자신의 철학적 사고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는 인생관의 문제, 특히 인간의 삶의 목적과 행복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장차 이런 문제를 가지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발전시켜 보았으면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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