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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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모스크바 종합대학 시절, 황장엽은 자신보다 두 살 어린 한 녀자를 만났습니다. 미모가 매우 아름다운 그녀는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유혹하는 수단이 4만가지도 넘는 여우라며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조언하는 선배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됨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황장엽은 계속해서 그 녀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느닷없이 나타나 내 책을 덮어버리고는 밖으로 나가자 하기도 했고, 때로는 만년필을 가지고 나가버리기도 했다. 물론 내가 따라나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따라나서면 그녀는 자신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데 비중을 두어 말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자기와 맺어진다면 내 연구사업을 여러 길로 도와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내가 듣기에도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더욱 친해지고자 하는 거짓말이라 여기고 관대하게 대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녀로서는 2단계 시도인 셈이었다. 그때부터 싸움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녀의 수단을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마음이 약하고 정직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정직하지 못한 자에게는 정직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상대방이 무기를 가지고 덤비는데 이쪽에서 맨손으로 방어하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



그 후로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면 나도 거짓말로 대하고, 정직하게 나오면 나도 솔직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는 거짓말로도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자, 차츰 두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전극장에서 고전연극을 관람하고 돌아오는데 그녀가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연극 구경은 다 쓸데없어요. 관람료로 차라리 맛있는 고기 요리를 해먹는 게 낫지.”



나는 그렇듯 연신 투덜대는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 고깃덩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가 그렇게 된 데는 환경 탓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최종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이었다.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던 소련계 조선인 고관이 모스크바로 오자, 그녀는 그 고관에게 가더니 며칠 동안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그녀가 자기 버릇을 고칠 수 없는 여자라고 단정하고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고관이 평양으로 돌아간 다음 나를 찾아와 사죄했지만, 나는 그녀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두어 달 동안 계속하여 나를 만나려고 쫓아다녔다. 그러나 돌아선 내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고 차츰 멀어져 갔다. 비록 그녀와 깊은 관계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여자를 알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두려워하던 지난날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타락시킨 것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것도 알았다. 조금 감상적으로 덧붙인다면 그녀를 구원해 주지 못한 데 대해 오랫동안 자책감 비슷한 느낌을 품기도 했다.



이제 아내를 만난 얘기로 들어가자.



1952년 5월, 나는 한 여자와 교제를 시작했는데, 그녀가 바로 50년 가까이 나와 고락을 함께한 아내 박승옥이다. 그녀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에 간호병으로 참가했다가 제대하여 모스크바 제1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아홉 살 아래였다. 나는 학생위원장이었고 그녀는 의과대학 반장이었다. 그녀가 내게 의과대학 조선인 학생들의 실태를 보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둘 사이는 자연히 친해졌다.



나는 그녀를 처음부터 진정으로 대했으며, 그녀 역시 나와 (이미 헤어진) 미모의 그 여자 간에 얽힌 소문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 유학생들은 박승옥과 나의 만남을 모두 반겼고 또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솔직했으며 실천력이 강한 여자였다.



소련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를 위하는 것이 하나의 도덕률이었다.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련 풍습을 따라 여자가 남자와 친해지면 그 남자가 마치 자신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위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박승옥은 극장이든 상점이든 어디를 가든지 앞장서서 일을 처리했다. 또 러시아 사람들과 교섭도 잘하고 흥정도 잘하는, 매사에 능력이 출중한 여자였다.



그녀는 정치적 지위보다 학문적 권위와 사람됨을 더 귀중히 여겼다. 자기 아버지가 생모와 이혼한 데 대해 늘 불만이었고, 어머니를 몹시 동정했다. 나를 만날 즈음 그녀에게는 뒤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대사관에 근무하는 서기관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를 멀리하고 나를 만났다. 그녀는 일생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나에게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시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충실한 아내이자 동지를 버리고 온 내가 어떻게 천벌을 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목이 멜 때가 많다.



1952년 여름, 나는 북한 무력부에서 온 대좌(대령)의 통역으로 헬싱키에서 열린 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사회주의 나라 사람들에게, 그리고 핀란드공산당과 사회당 사람들에게 조선전쟁의 실태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때 비행기를 처음 타보았으며, 자본주의 나라인 핀란드가 의외로 생활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핀란드에서 돌아온 뒤로 박승옥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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