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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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의 숨겨진 진실, 세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지난이야기 - 1945년 8월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후 북조선을 점령한 쏘련은, 동부유럽처럼 북조선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돌입합니다. 그들은 쏘련 극동군 88특별교도려단에서 훈련을 받은 김일성을 앞세워 정책을 집행하기로 했고, 김일성은 쏘련에 충성을 다하며 마침내 북조선의 지도자가 되는데.....



지난 시간에 살펴봤지만 1948년 쏘련군대가 철수한 후에도, 북조선 정권의 주요부문에는 쏘련 고문들이 배치되여 지도사업을 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김일성이 ‘자주성 문제’ 즉 ‘주체’를 주장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쓰딸린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수령으로 인정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기념행사가 있을 때면 “쓰딸린 대원수 만세”를 먼저 부른 후 자기나라 지도자의 만세를 부르는 것이 기본이였습니다. 김일성도 자신의 연설이 끝나면 언제나 “위대한 수령 쓰딸린 대원수 만세”를 불렀습니다. 1958년 김일성의 연설문이 수정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연설문에서 ‘쓰딸린 만세’라는 문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즉 쓰딸린의 권위가 드높던 시절에 김일성이 “주체”를 강조하는 건 불가능했다는 말입니다.



황장엽은 이처럼 강력했던 쏘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김일성이 자신의 독재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6.25 조선전쟁이였다고 지적합니다.



황장엽 : 그러다가 조선전쟁이 일어나면서 김일성이 군대 사령관이 됐다. 최고사령관. 군대의 권한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못하기 때문에 군권을 가지게 됐다. 거기다가 쏘련 군대가 안 나오고 중국 군대가 나왔다. 그리고 쓰딸린이 죽었다.



김일성은 6.25조선전쟁을 통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는 군대의 무력을 바탕으로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중국 군대의 참전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장성하자 김일성은 이를 기회로 쏘련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중국 군대의 참전은 김일성에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조선을 해방하겠다며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도리어, 서북쪽으로는 자강도 초산과 동북쪽으로는 함경북도 청진까지 몰리면서 조선반도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였습니다. 이것을 팽덕회가 이끄는 수십만의 중국 군대가 구해준 것입니다. 물론 중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전쟁에 개입한 것이지만, 김일성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보내주지 않은 쏘련과는 달리 중국은 직접 피를 흘리며 싸워 주었습니다. 이것은 쏘련에 대한 김일성의 인식을 바꾸었고 나아가서 조선 내에 있던 쏘련파를 공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였습니다. 북조선 전문가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 교수는 자신의 책 “현대 북한의 지도자”에서 중국 군대의 참전의 의미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해설 : 김일성은 쏘련을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사상적으로나 과학,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제일 앞선 나라로 받들어 왔지만, 북조선이 가장 필요로 할 때 피 흘리고 도와준 나라가 중국이었다는 사실은 쏘련과 중국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즉 김일성의 마음에 반쏘. 친중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앞으로 북조선의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중국 군대의 개입 이후 전쟁이 갱도 방어전으로 넘어가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김일성은 내부 문제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생기자 본격적인 정치투쟁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전쟁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들씌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먼저 쏘련에서 파견되여 당사업을 완전히 쥐고 있던 허가이를 숙청하고 쏘련파로부터 당권을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남로당파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자기파의 기반을 확대 강화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숙청사업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최고점에 달했습니다.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당내에 남아 있던 연안파와 쏘련파를 몽땅 숙청하고 1958년에는 1인 독재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이때를 기점으로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황장엽의 말입니다.



황장엽 : (김일성은) 처음에는 당권을 가지기 위해서 허가이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는 남로당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는 중국 연안파를 제거하고, 마지막에는 쏘련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그런 방법으로 58년에는 자기의 독재체제가 서게 됐다. 그 때부터 점차적으로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썼지.



또 한 가지 우리가 짚고 갈 것은 1953년 쓰딸린의 사망과 1956년 쏘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있었던 흐루쇼브의 ‘쓰딸린 개인숭배 비판’입니다. 쏘련에서 불어온 ‘쓰딸린 개인숭배 비판’은 조선을 비롯해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쏘련의 지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쏘련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과 사상적 자주성을 요구하는 기운이 앙양되게 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김일성은 조선전쟁을 계기로 강화된 중국의 영향력에 의거해 쏘련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의 독자적인 독재체제를 세우는 동시에 독자적인 지도사상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이 나오게 된 력사적 배경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감히 쓰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충실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다만 쏘련에 대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다시 황장엽의 이야기입니다.



황장엽 : 그래서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자는 게 하나 있고 그걸 표현한게 쏘련에 대한 사대주의를 반대한다. 이게 첫 째이고, 둘째는 쏘련에 대한 경험을 교조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니까 두 가지다.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조선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다, 이것이 주체사상이지. (하지만 그때는) 감히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못하고 ‘주체를 세운다’고 했다.



김일성이 쏘련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내온 ‘주체로선’, 이 정치로선이 어떻게 맑스-레닌주의를 뛰어넘는 위대한 사상으로, 또 김일성주의로까지 변하게 된 것일까요? 다음 시간을 기대해 주십시오.



<추적, 사건과 진실, 주체사상의 숨겨진 진실>, 세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1. 황장엽 회고록. 시대정신

2.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시대정신. 황장엽 지음

3. 현대 북한의 지도자. 을유문화사. 서대숙 지음

4. 한 권으로 보는 북한사 100장면, 가람기획. 고태우 지음

5. 인터뷰: 전 로동당 비서 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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