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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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과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

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안녕하세요.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의 장성무입니다. 오늘은 제15과 ‘제네바 정치회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체결된 정전협정에서는 전쟁 이후 북과 남의 군사분계선과 전투행위의 중지에 대한 것만 합의되였습니다. 더욱 복잡한 문제였던 조선의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문제와 외국 군대의 철수문제 등 많은 정치적 문제들은 정전협정 이후에 정치회담을 다시 열어 론의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결렬될 수밖에 없는 회담이였습니다. 1947년부터 쏘련과 미국 사이에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간에 보이지 않는 리념 싸움, 다시 말하면 랭전이 본격화 되였습니다. 특히 조선반도의 북쪽에는 공산주의를 리념으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고, 남쪽에는 자유민주주의를 리념으로 하는 정부가 들어선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반도는 랭전의 중심이 되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발생한 6.25조선전쟁은 쏘련과 미국의 랭전을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조선에서는 미제에 대하여, 남조선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의식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행된 회담이 제대로 론의될 수는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북조선 당국은 이러한 국제 정세와 조선반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회담 결렬의 책임을 미국이나 남조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음은 고등중학교 6학년 교과서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에 서술된 정치회담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회의에 참가한 미국대표 덜레스놈은 저들의 요구가 통하지 않게 되자 제놈들이 <조선에 와서 몇십만명의 희생을 냈는데 이제 조선을 거저 내놓겠는가? 우리는 조선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광기를 부리기까지 하였다. 미제는 그 후 우리 측의 합리적인 조국통일방안들을 한사코 반대하면서 해마다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 하의 선거안>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북진통일>정책을 감싸기 위한 너울이었다.’



먼저 력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정전협정 이후에 치러진 정치회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치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1953년 10월 26일 판문점에서 열립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참가국의 범위와 론의 주제를 결정하는 문제에서부터 의견이 엇갈려 결렬됩니다. 해를 넘겨 1954년 1월 10일 북조선 외무상이 정치회담 재개문제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해 량측 련락관 사이에 회의가 다시 있었으나 이마저 결렬되고 맙니다. 결국 1954년 4월 26일부터 북과 남, 쏘련과 중국, 그리고 유엔군에 군대를 파견한 16개 나라를 포함해 총 19개 나라가 참가하여 조선 문제를 론의하는 제네바 정치회담이 개최됩니다.



하지만 제네바 회담에서는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문제와 조선반도에서 외국군대 철수문제를 둘러싸고 유엔과 공산주의 국가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로, 선거문제와 관련해서 남조선은 유엔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북과 남 전체의 전국적인 선거를 주장합니다. 반면 북조선과 쏘련, 중국은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인민위원회가 관리하는 전국적인 선거를 주장합니다. 둘째로, 외국 군대 철수문제와 관련해서는 공산주의 국가 측은 선거 이전에 모든 외국군대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남조선과 미국은 김일성과 쏘련, 중국이 다시 남침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합니다. 이후 쌍방은 공방을 거듭했으나 더 이상 론의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무산되여 결국 분단이 고착되게 됩니다.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 제15과 ‘제네바 정치회담’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제16과 ‘북조선의 전쟁 피해와 1인 독재체제의 시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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