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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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 핵심간부가 밝힌 총련의 실체, 네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지난이야기> 재일동포 귀국사업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후 북조선의 현실과 귀국자들의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귀국하겠다는 동포들의 수도 점차 줄어드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총련은 어리고 순수한 청년들을 유혹하거나, 강제귀국까지 시키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동포들을 북조선으로 보냈습니다.



첫 귀국선이 떠난 1959년 말부터 2년 후인 1961년 말까지 집중적으로 북조선으로 간 재일동포들의 수는 무려 7만 4700여명, 당시 총련 청년동맹 도찌기현본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던 한광희 동포도 직접 많은 동포들을 설득해 북조선으로 귀국시켰습니다. 그 중에는 우츠노미야에 살았던 김가 성을 가진 고등학생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고 학교성적도 별루였으며 말이 없고 소심했습니다. 한광희 동포는 그 소년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해 귀국을 권고했습니다.



한광희: "사는 것이 힘들지, 외롭구, 너 조선에 가지 않을래? 거기 가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구, 커피도 매일 마시고"



그때마다 소년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쉽게 끌려들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쯤 동포들 속에는 북조선의 사정이 총련의 선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소문이 쫙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소년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우츠노미야에 있는 백화점에서 아메리카인디안 전통공예품 전시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진열됐던 진귀한 은 목걸이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시회에 와서 그 목걸이에 무척 흥미를 보이던 김소년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한광희 동포는 다른 총련 사람들과 함께 김소년이 구속돼 있는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효과: 웅성웅성하는 소리, 책상을 두드리며 거칠게 항의하는 소리.



한광희 : (거칠게 항의) 그 소년이 했다는 증거라도 있소? 목격자가 있냔 말이요!”

남2 : “조선 사람이라고 함부로 범인 취급하는가? 이건 민족차별이다!”

사람들: (항의, FO) 당장 소년을 풀어주라! 증거도 없이 사람을 가두는 법이 어디 있어! 서장 나오라고 해!

다행히 그날 오후 우츠노미야 역 화장실에서 분실됐던 그 목걸이가 나왔고 얼마 후 진범인도 잡히면서 소년의 루명은 벗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그는 극도로 사람을 불신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다 하고 한광희동포는 본격적으로 김소년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광희 : (은근하게) 이 나라에 있는 한 언제까지고 조선인이라고 차별당할 수밖 에 없어. 너는 학교성적도 고만고만하고 무엇보다 취업도 쉽지 않잖아. 그럴 바엔 차라리 귀국하는 것이 낫지 않아? 그럼 대학에도 갈수 있고 직업도 잘 잡을 수 있는데 말이야”



결국 김소년은 결심을 굳히고 이후 귀국선 100차로 단신귀국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김소년은 행방불명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총련조직을 찾아가 울면서 하소연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한광희 동포는 여기저기 몸을 숨기느라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하지만 총련에 빠져있었던 한광희 동포는 귀국선전사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수기에 적고 있습니다.



한광희: (참회) 그런 방법으로 내가 귀국시킨 동포들이 다 해서 13명 정도 됩니다. 솔직 히 당시 나로서도 조선이 지상락원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자기를 속였습니다. 스스로를 속여서 조선을 지상락원이 라고 억지로 믿었고, 동포들까지 속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나를 믿고 많은 동포 들이 북조선으로 귀국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용서를 구한 들 무엇이 달라지겠 습니까.... 그래도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들에게 사죄하고 싶습니다.



‘자기 때문에 수많은 동포들이 지옥으로 갔다’는 한광희 동포의 량심선언은 총련이 재일동포들에게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가를 잘 알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총련의 귀국사업이 거기에만 머물렀을까요? 아닙니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총련의 귀국사업은 1970년대에 가서는 랍치라고 할 수밖에 없는 강제귀국으로까지 변하게 됩니다. 당시 총련중앙본부 선전국에서 사업하던 한광희 동포가 폭로한 사실은 정말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광희 : “1972년 4월 15일 행사에는 약 1000명의 재일동포들이 참가했는데 그 중에는 오토바이부대도 있었습니다. 북조선 기발과 김일성 초상화를 전면에 내 세운 그들은 언젠가는 총련간부가 되겠다는 우수하고 충성심 강한 청년들이었습 니다. 그들은 김일성주석 생일 60돐에 즈음해 60명 선발되어 60대의 오토바이 에 타고 북조선으로 갔는데 본인의사와는 관계없이 이후 그대로 북조선에 눌러 앉게 되었습니다. 두 번 다시 일본에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 오 토바이부대는 총련이 김일성 생일에 바치는 충성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축하대표단 같은 각종 명목으로 북조선을 방문했다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발이 묶여 두 번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동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재일동포들의 귀국사업은 총련 간부들이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리용됐습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총련 부의장으로서 북조선으로 귀국해 부주석까지 지냈던 김병식에 관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한광희 동포의 수기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광희 : “김병식은 한덕수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실각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972년 8월 김병식은 제1차 북남적십자회담 북측대표로 평양으로 갔다가 두 번 다시 일본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자기 정적을 쩍하면 본국으로 보내버리군 하던 그 로련한 야심가도 결국은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재일 동포들을 지상락원이 아닌 지옥천지로 떨어뜨린 총련의 재일동포귀국사업, 북조선 당국의 지시 하에 총련 조직이 저지른 죄악은 비단 그것뿐이 아니였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총련 핵심간부가 밝힌 총련의 실체”, 네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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