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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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황해제철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첫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90년대 중반 수백만 명의 인민들이 무더기로 굶어죽어 나갔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도 김정일은 인민들이 살 길을 찾아 떠날 자유마저 가로막았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김정일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불안을 느낀 김정일은 군대의 무력을 동원해 이 난관을 돌파하려고 하고, 이 와중에 1998년 황해북도 송림시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추적, 사건과 진실, 그해 황해제철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1998년 2월 황해북도 송림시, 땅크와 장갑차가 굉음을 뿜어내며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습니다. 철갑모를 쓰고 총창을 비껴든 인민군 군인들이 살기어린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순식간에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송림시를 점령했습니다. 그날부터 ‘남조선 간첩과 련계된 놈들이 황해제철소가 돌아가지 못하게 설비들을 훼손시켰다’며 여러 사람들이 체포되였고 총살이 이어졌습니다. 송림시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황해제철소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왜 군인들이 땅크까지 동원하여 송림시를 점령한 것일까요? 이 사건을 리해하기 위해서는 90년대 중반의 북조선 정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96년에 식량난이 점점 심각해지자, 그해 11월 중앙당 비서들이 모여 전국의 량곡 생산량을 따져보았습니다. 그런데 평년작황의 절반도 안 되는, 그것도 겉곡으로 210만t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보통 북조선 전체 인민들이 필요한 1년치 곡물량은 450만t 정도인데, 겉곡 210만t이면 인민들은 커녕 군량미도 대지 못할 상황이였습니다.



식량생산량으로 봤을 때 래년에는 더욱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한 중앙당 비서는 너무 걱정이 되여서, 식량사정과 굶어죽은 사람들의 수자에 대한 통계를 직접 장악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중앙당 조직지도부 책임간부를 조용히 찾아갔습니다.



책임간부 : 비서동지, 이 통계는 절대로 다른 데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비서 : 그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실태를 정확히 알아야 대책을 세우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입니까?



책임간부 : 95년에는 당원 5만명을 포함해 50만명이 굶어죽었고, 96년에는 11월 중순까지 100만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비서 : 정말 그 정도입니까?



책임간부 : 믿기 힘드시겠지만 정말입니다. 비서 동지도 올해 식량생산량이 210만t 밖에 안 된다는 걸, 잘 알 겁니다. 아마 이대로 나간다면 래년에는 200만 명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비서 : 우에서는 어떻게 하시겠답니까?



책임간부 : 아시지 않습니까? 올해 식량생산량을 보고하면 군량미 문제 때문에 한바탕 란리가 날 것 같습니다.



그해 12월 김정일은 인민군대의 군량미가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했습니다.



김정일 : 뭐야! 군량미가 떨어져. 너희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모든 수단을 다 세워서라도 당장 대책을 세우라.



이에 따라 당 조직들과 각 기관들이 총동원되여, ‘애국미 헌납운동’을 강행하였습니다. 특히 군과 리의 농촌간부들을 발동시켜 농민들이 자기 먹을 식량으로 남겨놓았던 몫 가운데서 3개월분을 무조건 떼어서 군대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일제 때의 공출보다 더한 수탈이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예상대로 1997년은 끔찍했습니다. 살인강도가 떼 지어 출몰하고, 사람 고기를 파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굶주린 군인들이 ‘장군님의 군대’라고 떠벌리며 주민들의 식량과 가축을 략탈해 갔습니다. 숱한 죽음을 목격하다 나니 시체를 봐도 무감각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습니다.



녀1 : 이대로는 정말 못 살겠다. 빨리 전쟁이라도 콱 일어나 끝장을 냈으면 좋겠다.



녀2 :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가?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뭘 하겠나?



이제야 인민들은 당과 장군님만을 믿고 의지했다가는 앉아서 굶어 죽어야 할 운명밖에 차례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인민들은 자기의 살길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러한 움직임마저 무력을 동원해 잔인하게 짓밟았습니다.



김정일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그동안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1995년 6군단 사건을 비롯해서, 1996년 12월에는 금수산기념궁전 출입 계단 우에 김정일을 반대하는 전단이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김정일을 반대하는 조직을 만들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비밀처형을 당했습니다.



김정일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당의 통제로는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무력의 최고 집단인 군대를 앞세울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김정일은 보위사령부를 적극 활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미 김정일은 보위사령부를 통해 군대를 재정비해 왔습니다. 프룬제아까데미 사건과 6군단 사건 등을 통해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군대간부들과, 김일성의 측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했습니다. 특히 보위사령부는 6군단 사건을 처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인민무력부 보위국에서 국방위원회 직속기관인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였습니다. 중장이였던 원응희도 순식간에 대장으로 초고속 승진되였습니다. 김정일은 이렇게 보위사령부에 절대적 권력을 쥐어준 다음, 원응희를 조용히 불러들였습니다.



김정일 : 보위사령관!



원응희 : 네, 최고사령관 동지!



김정일 : 알다시피 지금 공화국 내부는 전시상태와 마찬가지야.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나서는 방법 밖에 없어. 지금부터 보위사령부가 주민들까지 군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겠어. 지금의 비상사태를 하루빨리 수습할 자신이 있는가?



원응희 : 네. 자신 있습니다. 최고사령관 동지의 지시를 목숨으로 관철하겠습니다.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가 맡고 있던 주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보위사령부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전시상태에서 군대가 모든 것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전 국가적으로 공포를 최대한 높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보위사령부의 진가는 1998년 황해제철소 사건에서 발휘되였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그 해 황해제철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1.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황장엽, 월간조선사)

2. 탈북자 수기: 그해 황해제철소에서는(정철민), 황해제철소 로동자 폭동사건(이춘구)

3.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신동아. 2006년 3월호)

4. <비밀 대화록 입수> 김정일의 너무나 솔직한 육성고백 전문(월간조선 2003년 1월호)

5. 탈북자 김혁준(가명)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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