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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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부 비운의 녀자 성혜림, 두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이모는 73년경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신경성 질환과 불안 때문이었는데, 불안증세는 김경희가 이모를 가슴 아프게 한 이후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이모의 정신을 병들게 했다. 불안증, 우울증, 신경쇠약, 신경증이 겹쳤다. 결국 이모는 74년부터 모스끄바로 치료를 다니기 시작했다.



73년에 들어서면서 지도자 집무실의 타자수 김영숙이 김정일의 2호 부인으로 자리잡게 된다. 서른 살 넘도록 장가갈 생각을 안 하니 김일성이 이제 장가도 가고 자신에게 손주도 낳아줘야 할 거 아니냐고 김정일을 다그쳤다고 한다.



해설 : 김영숙은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결혼한 여자로 1947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본처지만 공식석상에 나와본 적이 없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자신의 수기에서 김영숙과 김정일의 결혼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성혜랑 : 혜림이 세 살 난 정남이를 업고 관저 마당에 있는데, 정일의 녀동생 경희가 왔다. 결혼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오빠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비서는 그런 못할 짓을 혜림의 면전에서 할 수가 없었다. 그날이 잔칫날인 줄 알았으련만 지도자는 낮잠만 자고 있었다. 경희가 왔다니까 등을 돌리고 돌아누웠다. “가자요, 오빠. 가자요.” 경희가 시뜩해서 오빠를 채근했다. 그녀는 정일을 깨워 데 리고 갔다. 혜림은 아들을 업고 살구나무 옆에 어정쩡히 서 있었다.



김정일은 부랴부랴 김영숙과 결혼했다. 그래서 낳은 딸이 설송(雪松)이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뒤에 태어난 손녀를 먼저 본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이모는 더욱 화병이 났다. 상태가 심해졌다. 73년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이모의 건강은 74년에 접어들면서 굉장히 심화됐다. 봉화진료소에 두 달씩 입원하기도 했고, 모스끄바에서도 입원했다. 이모의 신경쇠약, 불안증, 우울증세가 심화된 것은 김영숙이라는 존재도 이유가 됐을 것이다.



모스끄바에서 이모는 보통 크레믈리 정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요양을 하기도 했다. 이모 담당의사는 알류니나라는 정부병원 과장으로 내과의사인데, 이모가 자주 식사에 초대하는 것을 보았다. 이모의 상태가 안 좋으면 간호원과 함께 왕진을 와서 주사를 놓고 가는 일도 가끔 있었다.



크레믈리 병원에는 모스끄바 교외에 부설 요양소도 있었다. 로씨야말로 요양소를 싸나또리라고 하는데, 이모가 가는 요양소는 규모가 굉장히 컸다. 경찰이 지키는 정문을 통과하고도 한참 가야 몇 백 미터씩 떨어져 있는 단독 병실에 도착하는 규모였다. 요양소 안에는 뽀트를 타는 작은 호수도 있었다. 시설도 잘되어 있었다.



이모가 있던 병실이 중국 모택동(毛澤東) 주석의 부인 강청(江淸)이 입원해 있던 병실이라고 했다. 이모가 요양소에 가면 보통 한 달씩 있었는데, 그 동안 식사를 매일 가져갔다.



아침은 요양소가 제공하는 빵을 먹고, 점심과 저녁은 가져다 먹었다. 요양소에 계실 때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도 그랬다.



74년부터 이모는 치료를 위해 몇 개월씩 모스끄바에 갔다가 평양에 돌아왔다. 76년부터는 내가 모스끄바에 따라갔다. 공부를 위한 게 목적이었지만, 부수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측근보다 피붙이가 낫지 않을까 하는 리유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무리 측근들이 충성을 다한다 해도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는 믿을 만한 피붙이만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스끄바에서 이모는 우울증이나 불안, 신경쇠약 때문에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모로서는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히스테리였지만, 그것을 받아줘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아빠트에 사는 최준덕이나 관리인들이 이모의 히스테리의 화살받이가 됐지만, 모스끄바에 간 뒤에는 내가 이모의 짜증을 받아줘야 했다.



이모는 가만히 누워 계시다가도 울컥하면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밥 먹다가 남긴다고 소리지르는 등 말도 안 되는 것을 트집잡는 일도 많았다. 나와 얘기하다가도 문득문득 김영숙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당시 이모 방에는 김일성의 초상화 옆에 김정일의 초상화도 같이 걸려 있었는데, 초상화에다 고래고래 욕하는 때도 있었다. ‘계집에 빠졌다.’고 욕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경희 고모가 어쨌더라? 그렇게 고모한테 잘 해줄 거 같으면 오누이 둘이서 살지.”라고 하면서 한때 자신을 내치려 했던 김경희에 대한 원한도 초상화에다 대고 퍼붓는 것이었다.



이모를 어머니처럼 생각했지만, 병세가 심할 때는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이런 소리하면 환자인 이모를 조카가 제대로 간병하지 못했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당시 어린 나이에 마음 고생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해설 : 1995년 남조선에 있던 리일남은 어머니 성혜랑과 연락이 닿았다. 당시 성혜랑은 동생 혜림과 함께 모스끄바에 나와 있었는데, 이때 리일남은 성혜림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14년 만에 전화를 통해 조카를 만난 성혜림은 “어린 나이에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가슴 아파 했다.



성혜림 : 일남아!



리일남 : 이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성혜림 : 괜찮다..... 일남아, 이모가 참 너한테 많이 미안하구나.



리일남 : 이모님, 별말씀 다 하십니다. 그렇게 많이 아프셔서 어떻게 해요.....



성혜림 : 일남아, 정말 미안하다. 이모는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일남아, 마음 굳세게 먹어라. 우리 먼 훗날 만날 때까지 마음 굳게 먹고 굳세게 살아라.



어머니는 82년에 내가 사라지자 이모가 제일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이모는 자신의 “상태가 가장 좋지 않았던 70년대 후반에 모스끄바에 같이 있으면서, 일남이한테 온갖 히스테리와 욕설을 퍼붓고 어린 나이에 고생시킨 게 마음에 걸려서 제명에 못 죽겠다.”고 하면서 우셨다고 한다. 사람이 없어지면 못해줬던 게 머리에 남는 모양이었다. 이모는 내가 없어진 다음에 그런 얘기를 하면서 계속 우셨다는 것이다.



이모의 병세가 굉장히 심한 적이 있었다. 77년의 일인데, 유서까지 써놓을 정도로 병이 심했었다고 한다. 나는 그때 모스끄바에 있었다. 이모가 유서를 써서 내 동생 남옥이에게 전했다고 한다. 남옥이 얘기에 의하면 이모는 그때 봉화진료소에 입원해 있었는데, 김정일이 병상에 와서 몇 시간씩 이모를 지켜봤다. 눈물을 흘리면서 빨리 나아야 한다고 위로했다고도 한다.



바람을 피운 것은 사실이지만, 김정일은 이모에게 상당히 신경을 썼다고 생각된다. 모스끄바에 갈 때 수행원들을 딸려서 보내는 것은 물론, 돈도 많이 주었고 주.부식을 보내주는 등 신경을 많이 썼다. 정남이 엄마이기 때문에 잘 대해준 측면도 있었지만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김정일은 가끔 내게 “나이든 이모, 그저 정으로 살지 뭐.”라고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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