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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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부 김정일, 곁가지를 제거하다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https://umg.uni-media.net/mp3/finish/leeilnam_story/leeilnam_story22.mp3s




해설 : 김일성은 김정일이 만든 김성애 관련 자료를 토대로 김성애 일파를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시켰다. 특히 한창 권세를 휘두르던 김성애를 격하시키면서 이후 김성애는 2년 동안 대외적 행사에 나타나지 못했다. 김성애가 사라지자 김정일의 위상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김영주 조직비서도 해임한 후, 지방에 내려가서 쉬라고 했다. 김영주는 김일성의 동생이고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였다. 조직비서는 총비서인 김일성 다음의 제1비서이다. 김영주는 또 북남공동성명의 서명자로서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득세했었다. 김일성은 그때 처음으로 ‘곁가지’라는 말을 했다. 김일성을 제외한, 정통적 유일사상을 제외한 다른 것은 모두 곁가지라고 언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동생 김영주와 부인 김성애 등 친인척을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시켰다.



해설 : 원래 김정일의 최대 정적(政敵)은 김성애가 아닌 김영주였다. 김정일은 삼촌을 밀어내기 위해 60년대 후반에 치렬한 권력투쟁을 벌렸는데, 나이는 어렸지만 독한 김정일이 우세를 보였다. 권력투쟁에서 온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김영주는 70년대 초반 ‘신경성 부조화증’이라는 심각한 병까지 걸린다. 김일성의 마음도 김정일에게로 점점 기울어져 갔고 결국 김영주는 부총리로 직위가 떨어지고 만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자 김영주는 량강도의 어느 산골로 쫓겨 갔다.



그런 일이 벌어진 70년대 이전에는 김정일이 평일이나 경진이, 영일이를 예뻐했던 걸로 알고 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어린 동생들이라 꽤 귀여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과 김성애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김정일의 이복동생들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고 한다. ‘곁가지’ 취급을 한 것이다. 김정일이나 김경희, 장성택 등의 측근들끼리는 김성애와 경진, 평일, 영일이를 곁가지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평일이는 별 볼일이 없었다. 물론 ‘수령님의 아들’로서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세는 아니었다. 평일이와 경진이는 모두 당 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남산고등중학교를 거쳐서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나왔다. 경진이는 모스끄바로 유학했고, 평일이와 영일이는 독일로 유학 갔다. 정규과정을 밟은 것은 아니고, 잠깐잠깐씩 가서 공부했다.



김평일은 유학 갔다 와서 호위사령부에 입대한다. 당시 ‘판문점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항공모함을 조선반도 근해에 집결시키는 등 조선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이에 자극 받은 김평일이 전휘 등 친지들을 끌고 호위사령부에 자진 입대했다. 호위사령부 작전 참모부 계열로 입대했는데, 입대하면서 바로 상좌를 달았다. 전휘는 당시 전문섭 호위사령관의 아들인데 같이 입대했다. 그러나 입대해서 군복은 입었지만 주어진 일도 없었고, 일을 찾아서 하지도 않은 것 같다.



할 일이 없으면 엉뚱한 짓을 하게 마련이다. 매일 호위사령부 협주단 녀자애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김일성 지방별장에 놀러가 술이나 마시고 놀았다는 것이다. 김평일이 소규모지만 연회를 한다는 소식이 김정일에게 직보가 됐다. 김정일은 76년부터 ‘친애하는 지도자’로서 조선의 2인자로 확실하게 자리가 잡혀가고 있을 때였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바로 보고했다고 한다.



김정일 : 수령님!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김일성 : 무슨 일이 있어?



김정일 : 그게....



김일성 : 뭔데, 그렇게 머뭇거려. 빨리 말해보라.



김정일 : 평일이가......



김일성 : 평일이가 왜?



김정일 : 평일이에 대한 직보가 들어왔는데, 전휘랑 같이 호위사령부 협주단 녀자애들을 끼고 수령님 특각으로 놀러를 다닌다고 합니다.



김일성 : 정말이야?



김정일 : 네, 저도 믿기지가 않아서 다시 확인을 해봤는데 벌써 여러 차례 녀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술 마시고 놀았답니다.



김일성 : 당장 평일이놈 불러들이라!



김일성은 김정일의 보고를 받고 진노해서 평일이를 제대시켜 집에서 공부나 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남조선으로 온 후 김평일이 벌가리아 대사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평양에 있을 때 김경진의 남편을 체스꼬 주재 대사관 당비서로 보냈다. 그 후 김경진의 남편은 오지리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해설 :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이 안정화 된 후에는 김영주와 김성애를 불러들였다. 물론 외곽에 머물러 있게 했지만 이들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복동생들 특히 김평일은 권력의 주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했다. 이른바 핵심 곁가지인 김평일은 제구실을 못하도록 했는데, 김평일을 외국에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한 외교관의 수기에 잘 나와 있다.



외교관 :김정일은 우선 남산고급중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함께 다녔던 김평일의 동창생들을 모두 삼수갑산으로 쫓아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김평일과 한번이라도 사진을 찍은 영광을 누렸던 곁다리 친구들까지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줄줄이 밀려났다. 그러자 김평일은 가까운 친구들마저 없어진 고립무원의 궁중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김정일의 외국 근무 제의에 동의하였다.



당시 김평일의 친구들, 소위 김평일 세력은 전문섭 호위사령관의 아들 전휘, 그리고 항일 투사 류경수의 아들 류영근이었다. 류경수는 6.25 때 탱크사단장을 했고, 대남침투부대인 특수8군단 군단장도 했다. 류영근은 내가 호위사령부 병원에 입원해 있던 76년, 술 먹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 식물인간이 됐다. 호위사령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평일이 여러 번 왔었다. 전휘는 김정일이 보고하는 바람에 철직되어 지방으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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