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은 어떻게 경제강국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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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강 자동차공업의 육성(1970년대)

남조선은 어떻게 경제강국이 되었나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3-02-22 16:54

한국 정부는 1969년 말에 자동차 및 주요부품의 국산화정책을 세웠다. 향후 SKD.CKD를 금지하여 국산화율을 1969년 38%에서 1972년 100%로 높인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완성차 조립공장과 부품공장을 분리하되 부품공장을 수평계열화하며, 완성차 조립회사는 엔진가공공장과 차체공장을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했다. 부품공장을 수평계열화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변속기 제조업체 1곳이 여러 완성차 업체에 변속기를 납품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국산화 실적에 따라 1971년 신진, 현대, 아세아에 각기 1만대, 5천대, 5천대의 생산허가를 주었다. 정부는 국산화 실적이 높을수록 더 많은 생산 허가를 내주었으므로, 자동차 3사는 국산화를 위한 투자를 해야 했다 그런데 1970년 12월 도요타가 중국시장 진출을 위해 한국을 버림에 따라, 신진-도요타 합작계획이 취소되었고, 현대-포드의 합작계획도 결렬되었다. 대신, 3륜차 업체였던 기아산업이 1971년 초 4륜 화물차 허가를 받고 완성차공장 건설에 착수 하였다. 정부는 1973년 장기자동차공업진흥계획을 세워서 각사에 고유모델 승용차공장을 건설토록 했다. 후발국 자동차 회사들은 선진국 회사의 모델과 핵심 부품을 들여와 단순 조립하였으므로, 고유모델을 갖지 못했다. 고유 모델이 없는 한 외국에 수출할 수도 없고 부품산업도 발전하기 어려웠다. 이에 정부는 고유모델 개발을 독려하였다. 가장 먼저 성과를 내 것은 기아산업이었다. 기아는 엔진공장 건설 후 1974년 10월 1000cc승용차 브리사를 개발하여 1975년 승용차 시장을 석권했다. 브리사는 모델은 외국산 모델이었으나, 국산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국산차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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