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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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과 강화되는 쁠럭불가담국가 외교

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안녕하세요.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의 장성무입니다. 오늘은 제34과 ‘강화되는 쁠럭불가담국가 외교’를 살펴보겠습니다. 북조선이 쁠럭불가담국가들과의 외교에 주력하게 된 것은 1961년부터였습니다. 이 시기 중쏘분쟁으로 혼란해진 국제 사회주의 운동만 믿고 있을 수 없었던 김일성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나라들 중 북조선에 협조적인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남조선을 공산화하는데와 김일성 자신의 1인 독재를 강화할 외교적인 력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이러한 북조선의 쁠럭불가담국가 외교로선은 중국의 “대중립권 외교”라는 로선과 그 길을 같이 한 것이었습니다.



<제3세계>라는 쁠럭불가담국가 잡지에 실린 김일성의 글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의 괴뢰정부들이나 추종 국가를 빼놓고는 이 모든 나라들이 다 반제, 반미 역량으로 된다. 국가의 사회정치제도와 정견과 신앙의 차이는 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함께 하는데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 이 모든 역량을 반미공동투쟁에 끌어들여 미제를 최대한으로 고립시키고 그에게 공동으로 타격을 가해야 한다.’



이러한 김일성의 계획으로 시작된 북조선의 쁠럭불가담국가 외교는 1961년 5월과 6월 사이에 내각부수상 리주연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아세아 3개국을, 6월과 7월 사이에는 보통교육상 리일경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하면서 시작됩니다. 또 중국의 수뇌들이 아세아, 아프리카 지역을 순방할 때도 이들을 뒤따라 대표단을 보내는 등 쁠럭불가담국가 외교무대를 넓혀나갑니다. 1964년에도 최원택이 동남아세아를, 12월에는 최용건이 아세아, 아프리카를, 1965년 5월에는 다시 리주연이 아세아와 아프리카 지역을 순방합니다.



초청외교도 활발했습니다. 1964년 11월에 에짚트의 가말 아브델 나쎄르 대통령을 시작으로 알제리의 벤베라 대통령, 아프리카 말리의 민족회의 의장인 기네의 세쿠투레 대통령 등이 평양을 방문합니다. 김일성은 1965년 4월에 인도네시아를 방문합니다. 이와 같은 쁠럭불가담국가들에 대한 외교노력으로 아세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많은 령사관과 대사관을 설치하였고, 중립국과의 유대를 강화해 평양-북경-프놈펜-자카르타를 축으로 하는 반미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계기를 만듭니다.



그러나 1965년 9월에 중국공산당이 인도네시아를 공산화하기 위한 음모에 개입한 것이 밝혀지고 같은 해 중국이 알제리에서 개최하려고 한 제2차 반둥회의가 결렬되자 북조선의 전략에도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중립국 국가들이 차례차례로 중국에 등을 돌리게 되면서 중국이 고립되자, 중국의 대중립권 외교로선을 따라 진행한 북조선의 쁠럭불가담국가 외교로선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간다, 케니야에 설치하기로 했던 대사관이 성사되지 않았고, 가나와 우루과이에 있던 대사관과 무역대표부가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또 공을 들였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쏘련의 외교에 편승하면서 북조선의 쁠럭불가담 외교로선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에짚트와 수리아, 버마 등의 나라들은 사실상 쏘련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쏘련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북조선은 쁠럭불가담국가를 중시하는 외교로선을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김일성은 ‘세계 공산당 및 로동당들은 독자적으로 자기 정책을 규정할 수 있으며 또 규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외교에서의 자주 로선을 선언하게 됩니다.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 제34과 ‘강화되는 쁠럭불가담국가 외교’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제35과 ‘박정희 정부의 출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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