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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0 - 가해기관 : 양강도 혜산시 보안서

라지오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6-12-26 19:08


안녕하십니까? 이광백입니다.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당국에 거주 등록을 하지 못해 불법 거주자로 내몰려 피해를 입었던 박미영 씨의 증언을 들어봅니다.

- 박미영씨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나 살았습니다. 2014년 6월에 탈북해서 같은 해 10월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 미영 씨 북한에 계실 때, 살던 집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다면서요?

제가 거주 등록을 못했습니다. 원래 시골(갑산)에서 살다가 혜산으로 시집을 가게 됐는데요. 그곳에서 부모님들이 마련해주신 집에서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거주 등록을 하지 못했어요. 신랑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선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남편이 광산이나 철도 부문에서 일하거나, 또는 군관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은 대학생이라 이 조건들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죠.

남편이 대학생이면 아내가 세대주가 돼야 했는데, 세대주가 되려면 돈을 벌며 일을 해야 해요. 하지만 저는 시골에서 와서 거주 등록조차 못하고 있으니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장마당에서 먹고 살아야 했는데, 그건 거주 등록 조건이 안 됐던 것입니다. 집은 우리 부모님이 사준 것이었지만 거주 등록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물론 한동안 그 집에서 살기는 했습니다. 2005년 12월에 집을 사서 2013년 3월까지 살았습니다. 8년 정도 살았죠.

- 그렇군요. 지정받은 거주지로부터 다른 거주지로 이사를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떤 경우에 허가를 해주나요?

허가라는 게 결국 거주(등록)에요. 예를 들어 시내에서 살다가 또 시내로 이주 한다고 하면, 즉 (거주 이전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면 그 동네 보안원과 보위원들이 ‘이 사람을 받겠다’는 확인서를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살면서 보니까, 본 거주지가 김포여도 서울에 와서 살아도 되더라고요? 북한에선 특정 관할, 특정 동 안에 들어왔으면 그곳을 담당하는 보위원과 보안원의 허가를 꼭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허가를 받으려면 뇌물을 고여야 하고요.

- 거주 이동, 그러니까 이사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렵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특히 시골에서 도시로, 혹은 외곽에서 시내 쪽으로 이동하려면 더 많은 제한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영씨는 어떻게 도시로 이사한 것이죠?

저는 원래 혜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시골 갑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가씨 시절 내내 그곳에서 협동농장원으로 일 했고요. 그러다가 대학생이던 남편을 만나 혜산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거주 등록 허가가 나지 않은 거예요. 농장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선 농장원은 농장원과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국가 자체가 ‘자기 땅에 뿌리를 내리라’는 식으로 유도를 해서 농장에 머물게 하는 겁니다. 농촌 아가씨들은 모두 도시로 나오는 게 소원인데 말이죠.

시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도시로 가서 살고 싶어 하지만 이건 쉽지가 않아요. 뇌물을 많이 줘야 하거든요. 농장원에서도 탈퇴를 해야 하는데, 이 절차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농장원에서 탈퇴한 후 노동지도원(인사과)에 가서 도장을 많이 받아야 하고, 담당 관리위원회 위원장인 농장 주인에게도 또 도장을 받아야 하거든요. 이후에도 다시 농장 보위원에게 도장을 받아야 하고, 협동농장 경영위원회 인사과에 가서도 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즉 군 단위에서 허가를 받고, 다시 도 단위에서 허가를 받아야 퇴거가 가능한 겁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뇌물을 내야 하는 셈이죠.

- 결국 당국의 허가 없이 도시로 이동한 것인데, 보안원이나 보위원들의 괴롭힘도 많이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식이었나요?

처음에 집을 잡아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거주 등록을 하지 못했으니 이런저런 말도 많이 듣고 시달림도 받았어요. 그래도 제가 늘 뇌물도 주고 사정사정 하면서 2013년까지는 그런대로 가슴 아프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2013년 1월 중국에 친척을 둔 한 여성 분을 도와준 게 화근이 됐습니다. 그 분이 제게 중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하는 것을 도와주면 어느 정도 돈을 챙겨주겠다고 해 함께 중국에 한 달 정도 다녀왔는데요. 한 달 후 돌아와보니 그렇게 중국에 다녀온 게 죄가 돼서 보안원과 보위지도원들의 감시가 한층 더 삼엄해져 있더라고요.

저는 사실 중국에 갔을 때도 내 고향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겠다고 생각해 다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올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죠. 중국에서는 언어도 안 통하는 데다 아직 북한에 자식도 있으니 그냥 여성 분을 도와주러 다녀온 것뿐인데, 그 이후로부터 감시를 받게 되니 너무 힘들더군요. 그나마 저는 매일 장사를 하러 돌아다녀야 했지만, 집에 계시던 우리 엄마는 늘 보안원과 보위지도원의 질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원래 시골에 사셨지만 제가 2012년에 모셔왔어요. 어머니가 사시던 지역에 상수 발전소를 건설하겠다며 어머니 집까지 완전히 부숴버렸거든요. 그렇게 어머니를 제 집에 모셔왔지만, 매일 같이 보안원과 보위지도원들이 어머니를 못 살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돌아가면 엄마는 늘 저를 붙잡고 ‘저리 가라’는 말만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우셨어요. 집에 대한 원망이 커져만 갔죠.

그렇게 2013년부터 2014년 탈북할 때까지 1년간 발길 닿는 데마다 ‘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세 번이나 했어요. 하지만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겨도 보안원이나 보위원들이 또 거주 등록이 안 됐다며 나가라고 했죠. 오죽했으면 제가 어머니와 함께 보천 쪽에 전혀 알지도 못하는 시골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보안원과 보위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서요. 그런데 거기서도 하도 못 살게 굴어서 다시 시내로 왔습니다. 다행히 시내에는 고모와 친척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보안원과 보위지도원들도 완강하게는 못 나오더라고요.

그렇게 서너 번을 이사하면서 든 생각은, 내가 중국에 갔다가도 내 나라 귀하다고 생각해 다시 돌아왔는데 이렇게 가슴에 비수를 꽂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이런 생각을 해요, 나를 이 곳에 내몬 것은 북한 너희들이다, 나를 잘 보냈다 라고요. 평생 국경 지역에서 살면서도 중국에 가겠다는 생각조차 안 해봤는데, 삶이 너무 힘드니까 아예 한국으로 가겠다고 생각이 확 바뀐 것이죠.

- 거주 등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뇌물을 줘서라도 허가를 받을 방법은 없었나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제가 8년간 계속 쫓겨 다니다보니까 (등록에 필요한) 문건이 몽땅 사라졌어요. 거주 등록을 하려면 그 문건을 다시 마련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죠. 그럴 바에는 그냥 한국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돈으로 보위원, 보안원들의 배를 불릴 바에는 내가 가는 게 편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 북한에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성분을 검사하면서 허가를 해주는군요?

지금은 성분도 안 봅니다. 권력과 돈만 있으면 돼요. 권력과 돈이 없으면 어디 가고 싶어도 못 가고 그 자리에서 죽는 날까지 살아야 합니다. 한 번 농장원이 되면 평생 농장원으로 사는 것이죠. 저희 아빠도 원래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일 하던 분이었는데요, 어머니를 시골에서 데려와 결혼했습니다. 아내를 시골에서 데려와 결혼하다보니 저희 가족이 몽땅 시골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당시 북한에선 농촌 진출 사업이라는 게 있었는데요. 1990년대 말 식량난 때 농촌에 남은 사람이 없다보니, 도시에서 우선 남자를 선발해가고 이후 1차, 2차 이렇게 순차적으로 사람을 뽑아 갔어요. 그 중에 저희 어머니도 선발됐는데, 남편이었던 아버지도 자연스레 동원된 것이죠. 그게 1996년이었습니다.

- 북한 당국이 이렇게 거주 이전에 제한을 두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통제를 하기 위해서죠. 탈북을 막기 위해 마치 감옥에 넣어두듯이 거주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누가 어디에 사는지 일일이 확인을 해야 하니 일단 통제를 한다고 보면 됩니다.

- 그렇군요. 한국에 오셔서는 집을 장만하셨나요?

네, 김포에서 살다가 최근 서울에 왔어요. 한국에선 오늘이라도 내가 다른 데 가서 살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더라고요. 서울에서 살면서도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고요.


북한에선 모든 개인이 살 곳을 당국이 강제로 배정합니다. 개인이 당국이 배정한 주거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경우 숨 막히는 감시를 피할 수 없으며 때론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집을 배정받거나 거주 이전을 허가받을 때는 성분에 따라 큰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븍한 당국이 주민들의 자유로운 거주 이전을 제한하는 이유는 오로지 당국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최소한의 기본적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거주 이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북한의 제도와 정책은 당장 폐지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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