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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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네 번째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31 16:22


시그널+타이틀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음악 : UP/DOWN



나레이션 :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대남공작원 김현희는 1988년에 열리는 서울 올림픽을 파탄시키기 위해 남조선 려객기 한 대를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친필지시를 받는다. 김현희는 1987년 11월 29일 이 임무를 수행해/ 려객기에 타고 있던 남조선 로동자 115명을 모두 죽게 한다. 도주하던 김현희는 중근동 바레인에서 체포된다. 붙잡히기 직전 독약이 든 담배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하지만 극적으로 되살아나 남조선으로 호송되는데.....



<나의 어린시절, 네 번째>



하루는 내가 애를 업고 밖에서 서성대고 있는데 아래층 아주머니가 부르더니 참외 하나를 깎아 주었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과일이라서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참외를 한 입 깨물었다. 그런데 그 맛이 어찌나 쓴지 얼른 뱉으려 했으나 준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삼켰다.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간신히 절반 정도를 먹고 더 이상 먹기가 힘들어 밖에서 먹겠다며 남은 반쪽을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아빠트 뒤쪽으로 돌아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가 살핀 뒤 남은 참외 반쪽을 땅에 묻고 발로 밟아 흔적을 없앴다. 그날 얼마나 혼이 났으면 그뒤 나는 쓴 참외를 왜 먹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참외만 보면 질겁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내가 먹었던 참외는 설익은 것 이였다.



우리는 꾸바에서 간식으로 빵을 먹던 습관이 들어 조국에 돌아와서도 집에 빵만큼은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놓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바깥 심부름을 다닌 곳이 아빠트 뒤편에 있는 밥공장이였다. 밀가루와 쌀을 자루에 넣어 가지고 가서 수수료 30전을 내면 떡이나 빵으로 바꾸어 주었다. 나이가 나보다 위인 옆집 녀자아이의 안내를 받아 밥공장에 가서 줄을 섰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줄의 끝에 서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린 끝에 겨우 내 차례가 되여 접수구에 빵과 바꿀 밀가루를 담은 소랭이를 내밀었더니 접수구 아주머니가, “떡은 있는데 빵은 지금 다 떨어졌으니 낙케 오라.”하고 말했다. 나는 떡만 바꾸어 손에 들고 ‘낙케’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한 채 벙벙해 있는데 옆집 아이가, “나중에 오라는 뜻이야.” 하며 ‘낙케’ 가 ‘나중에’라는 말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꾸바에서 생활하면서 개성 출신인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배웠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때도 불편함이 많았다.



동무들로부터 내 말씨가 황해도 말씨 같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또 일본어를 공부하면서는 일본말을 배우더니 어떻게 우리말을 일본말처럼 간사하게 하느냐고 말을 많이 들었다. 조국에 돌아와서 시작하는 생활과 환경은 모든 것이 다 어리둥절하고 낯설고 고생스러웠다. 다시 꾸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곤 했다. 오히려 꾸바가 나의 고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집 꾸미기도 끝나고 꾸바에서 부친 짐도 모두 찾아와 겨우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내 무릎에 이상이 왔다. 조국으로 귀국할 때 중국 검역소에서 검역원이 우려하던 관절염 증세가 나타난 것이였다. 증세는 갑자기 악화 돼 걷기조차 어려웠다.



“지난 번 검역원이 말할 때 무릎에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건데....”



어머니는 검역원이 하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심히 흘려버린 일을 몹시 후회했다. 꾸바는 열대지대이기 때문에 랭풍기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 랭풍기가 있는 방에 오래 있어서 관절염에 이상이 왔다는 것이였다. 주사도 맞고 약도 쓰며 어머니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관절염은 치료가 되였다.



꾸바에서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나자 아버지도 귀국하였고 우리 집은 오르내리기 편한 3층으로 이사해 내려왔다. 나는 이곳에서 중앙당에 공작원으로 선발될 때까지 살았다. 인민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 그 집에서 다녔기 때문에 가장 정이 든 곳이다.



이 아빠트는 그 시기에 건축한 옛날식 아빠트로 10여 가구당 하나씩의 공동 수도와 공동 화장실을 리용하게 되여 있었다. 더구나 연탄을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히게 되여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수도와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였다. 여름철에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겨울철이 되면 수시로 수도관이 얼어 붙어 물 긷기가 어려워 생활이 참 힘들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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