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경의 살며 생각하며

  • 방송정보매주 화요일 저녁 10시 방송 | 종영방송
  • 출연서미경

공식 SNS

제26화 낙엽

서미경의 살며 생각하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11-06 18:15


토요일 오후 가볍게 산책을 나갔다. 여름 내내 짙은 록음이 우거지던 동네 아파트 나무들이 이제는 그 이파리들을 많이도 떨어뜨리고 있다. 노란색과 갈색도 있지만 대개가 붉은 자주 빛이다. 어떤 것은 이러 저리 바람에 날려 다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누군가에게 밟혔었는지 반쯤 눌리어있고, 또 어떤 것은 세멘트 보도에 납작하니 엎드려있다.

얼마 전까지 파랗고 싱싱하던 이파리들이었는데, 언제 그렇게 퇴색이 되어 땅에 떨어진 걸까?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기를 쓰고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었을 텐데, 더 이상 기력이 없어 놓아버렸겠지, 나무와 열매에게 마지막 영양분까지도 죄다 내어주었을 테니까,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아버지생각이 난다.

그날도 이맘때였다. 론문연구를 위한 자료열람 차 평양출장 가있던 나는 두달 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당시 자료열람은 구실이었고 도피성 출장이었다. 집안이 그때 보위부 건으로 매우 뒤숭숭했는데, 그 불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 택했던 걸음이었다. 내가 있어봤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마침 평양 승인번호가 내려와 있기에 부모님 권고로 가출아닌 가출을 했던 것이다. 덕분에 평양에 가있는 동안 기분전환도 되고 심신도 많이 추스를 수 있었다.

집 떠날 때 푸르싱싱하던 아파트 주변의 나뭇잎들은 내가 돌아오던 그 날에는 모두 누렇거나 짙은 자주색으로 변해있었다. 포장도 하지 않은 길 우에는 락엽이 여기 저기 흩어져있었고 먼지와 함께 간간히 바람에 왔다 갔다 했다. 그 속을 걸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어수선하던지, 집 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집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물어가는 가을풍경이 꼭 우리 집 같아보였다.

집에 들어가니 부모님들이 그 사이 10년은 더 늙으신 것 같았다. 특히 아버지가 많이 수척해지신 모습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자식 둘이나 보위부에 잘못되고 남은 자식이라곤 이제 나 하나뿐인데……. 그런데 그날 청천 벽력같은 얘기까지 듣게 될 줄이야, 아버지가 위암에 걸렸으며 앞으로 얼마 못 사신다는 거였다. 우리 아버지 불쌍해서 어떻게 해,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서 내색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평양으로 간 뒤 아버지는 어떻게 하나 아들들을 구해보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동안 외화벌이 하면서 좀 벌어놨던 돈을 몽땅 털어 보위부사람들에게 매달렸다. 또 조금이라도 보위부에 연줄 있는 사람이라면 한밤중이건 가림 없이 무조건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피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빠들은 끝내 구명되지 못했고 고문 끝에 잘못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후 아버지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셨다. 처음에는 과로와 충격 때문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심상치 않아 병원에 가봤더니 위암말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억이 막히고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몹쓸 병에 걸리셨을까? 내가 평양에서 돌아온 후 반년정도 지나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는 자식들을 살려보시려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그렇게 락엽처럼 지고 말았다. 오빠들 문제가 아니라면 그리 안 되셨을 건데, 생떼 같은 두 아들을 그 사회가 뺏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오래 계셨을 건데,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허비는 듯 아프다.

바람에 락엽 하나가 날아와 발목에 떨어졌다. 그것이 아버지의 분신인 것 같아서 고이 주워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언제나 하던 대로 책갈피에 끼워놓았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