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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윁남 개혁개방의 배경 2

북한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9-03 18:15


사회 : 이번 순서는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시간입니다. 수령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간부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학생들과 함께,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방도를 살펴봅니다. 우리는 지금 중국에 이어서 윁남의 개혁개방 경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순서인데요. 윁남이 개혁개방 할 당시 정치경제적 배경과 그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도움 말씀에 윤성호 방송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윤 : 네, 안녕하십니까?



사회 : 지난 시간에 윁남의 개혁개방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윁남 개혁개방의 기본 원칙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윤 : 첫째는 장기적으로 다양한 경제부문을 개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농업이면 농업, 공업이면 공업의 특정 부분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농업과 공업의 전체 영역을 골고루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윁남 정부가 쓴 방법은 국가의 통제를 약화시키고 민간 부분에 대한 차별을 없이 한 것입니다. 통제를 줄이고, 민간부문의 차별을 없이하자, 개인이나 기업소들이 마음껏 생산 활동을 하거나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민간 부문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수많은 기업소들이 생겨나고 발전했습니다.



사회 : 국가가 사소한 것까지 계획하던 때에는 개인이나 기업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억눌려 있었다가, 민간 활동을 자유롭게 해주니 자주성과 창조성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요.



윤 :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상품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시장경제관계를 중시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윁남 정부는 자본주의 경제 방식이라는 시장경제를 중시하겠다고 공식선언하고 시장을 보호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선언했습니다.

윁남 정부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기업소들과 인민들은 시장을 믿고 마음껏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게 되었고, 시장을 통해 식량과 생활용품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 상품생산을 늘리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 방식인 시장경제를 중시했다는 것인데요. 시장경제가 국가계획 경제보다 상품생산을 늘리는 데 더 효과적인 리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윤 :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국가가 계획을 세워 생산품의 항목과 숫자를 정하고, 그 가격을 매기는 방법에 치명적인 약점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상품의 항목이 다양해지고 수가 늘어날수록 계획을 세워 생산품과 그 수, 그리고 가격을 매기는 일이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해지는 것이죠. 상품이 수백개나 수천개일 때까지는 국가계획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수백만개나 수천만개일 경우에는 국가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인민들의 요구는 끊임없이 늘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 상품과 그 수도 끊임없이 늘어납니다. 인민들의 요구에 생산력이 따라가려면 국가계획보다는 시장경제가 더 유연하고 효률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사회주의 경제 파탄이 보여준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 경제의 구조를 시장경제 식으로 바꾸는 데서 가장 력점을 두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윤 :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시장을 보호하고 강화한 것이 제일 중요했구요. 다음은 개방이었습니다. 윁남 정부는 경제정책의 목표를 농업을 발전시킨다, 생활용품 생산을 늘린다, 수출을 늘린다, 이렇게 세 가지로 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해외의 정부 및 기업소와 협력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마디로 개방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어 국제사회와 협력한 것이죠. 그와 같은 정책을 통해 윁남 경제에 없는 자본과 기술, 시장, 인력을 들여올 수 있었고, 이것이 윁남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회 : 당시 윁남은 경제위기가 심각했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급격한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했는데요. 그렇게 될 경우 보통은 극심한 사회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윤 : 그렇습니다. 생산량이 한꺼번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물건값이 하늘높은 줄 모르고 올랐습니다. 매년 물건값은 두배이상 폭등했습니다. 국가는 경제를 개발하기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쏟아 붓는 바람에 엄청난 빚어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윁남 정부는 돈을 억지로 찍어내서 그 돈으로 경제를 개발하고 그것이 정부의 빚을 늘리고, 물건값을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했던 것인데요.

이와 같은 혼란을 안정화하기 위해 정부는 돈 찍어내는 것을 억제하고, 빚을 줄였으며, 물건값을 안정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사회혼란을 안정화하지 않으면, 인민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사회 :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게 법을 정비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윁남 정부의 제도적 개혁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윤 :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외국인투자법을 만든 것입니다. 1987년입니다. 우선 돈과 기술을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죠. 1993년에는 토지상속권과 담보권, 사용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토지법을 개정했습니다. 개인의 토지소유권을 파격적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토지생산력이 높아진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기업소의 활동을 규정한 파산법, 외국인 투자법, 기업법 등을 차례로 만들었습니다.



사회 : 그와 같은 원칙과 준비를 통해 개혁과 개방을 시작했는데요. 먼저 농업부문 개혁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죠. 윁남의 농업개혁을 한마디로 무엇을 바꾼 것입니까?



윤 : 식량을 자유롭게 사고 자유롭게 팔게 한 것입니다. 윁남 정부는 이를 위해 우선 소규모 협동농장을 해체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농산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사회 : 처분권을 인정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습니까?



윤 : 도이모이 정책 시행 2년 뒤인 1989년부터 윁남은 생산목표량을 초과했습니다.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했습니다. 여기에다 140만톤의 쌀을 수출해 315만 딸라의 외화까지 벌어들였습니다. 이는 당시 전체 수출의 20%를 차지할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쌀과 함께 윁남의 주요수출품인 커피도 국영농장체제에서 벗어나 민간체제로 빠르게 바꾸었는데요. 그 이후 커피 경작면적도 1988년 하반기에는 9만ha로, 이전의 두 배나 늘어났습니다. 천연고무와 차 등 다른 산업작물의 재배도 늘어났습니다.



사회 : 농업 부문에서 짧은 기간에 그토록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윤 : 첫째는 농민들의 생산의욕이 높아진 것이고, 두 번째는 농업부문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집중투자라고 할 수 있겠죠. 국영농장을 해체하는 등 국가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꾸자 인민들과 기업소들이 스스로 자주적으로 경제활동을 시작했고, 일한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다준 것이죠.



사회 : 공업부문은 어땠습니까?



윤 : 우선 1987년까지 감소하고 잇던 공업생산이 이듬해부터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는 년평균 4.1%씩 늘어났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년평균 7.6%의 고도성장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공업 부문이 발전했습니다. 경공업 생산비중이 1980년의 62%에서 1989년 73%로 상승했습니다.



사회 : 수출은 얼마나 늘어났습니까?



윤 : 일단, 무역대상국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쏘련을 비롯한 공산권 나라들이 무역대상국이었습니다만, 개혁이후에는 일본, 싱가포르를 비롯한 서방국가로 바뀌었습니다.

도이모이 정책 시행 초기 윁남의 대일본 수출은 전체 30%, 수입은 4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또 싱가포르도 수교(1991년) 직후 윁남 수출의 36%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습니다. 그 결과 수출량도 크게 늘었는데요. 대외 수출이 본격화된 1992년 윁남의 수출은 전년보다 17.5% 늘어났습니다.



사회 : 원래 개방을 한 목적은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윁남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목적 때문이지 않았습니까?



윤 ; 그렇습니다. 개방이 되자, 윁남의 풍부한 로동력과 자원이 부각되면서 외국인투자가 크게 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외국인투자법이 제정되면서 윁남은 타이, 인도네시아 등 다른 동남아시아권 국가들보다 유리한 투자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1988년부터 외국자본이 본격적으로 윁남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기업들의 윁남에 대한 투자는 1988년 3억6천만 딸라에서 5년 뒤인 1993년에는 77억4천만 딸라로 스물한배나 급증했습니다.



사회 : 외국 투자가나 기업소들이 진출한 분야는 어떤 곳입니까?



윤 : 외국 자본이 늘어나면서 남조선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투자가와 기업소들이 윁남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외국투자기업들은 처음에는 섬유, 봉제, 신발, 가구와 같은 로동력이 많이 필요한 경공업을 중심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질 높은 윁남 로동자들을 리용해 돈을 벌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그러다 점차 관광과 호텔 같은 서비스업종과 가전제품, 건설, 기계 산업으로 투자 영역이 다양해졌습니다.



사회 : 개방은 곧 국제적인 경제협력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처음에는 몇몇 주변 나라들과 경제협력을 하던 윁남이 지금은 전 세계 나라들과 협력할 만큼 개방의 폭이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윤 : 윁남은 1998년 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가입하고, 2000년에는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체결합니다.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특히 2001년 12월부터 발효된 미국과의 무역협정으로 대미국 수출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당시 미국으로 수출되는 윁남산 제품의 평균 수입관세는 40%였는 데요. 미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이것이 4%로 크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2006년 11월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 15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사회 : 개혁과 개방 이후 윁남 경제의 총생산은 얼마나 늘어났습니까?



윤 : 개혁개방 직후부터 눈에 띤 성과를 거두었습니다만, 특히 2000년 이후 그 성과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반석위에 올랐습니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적게는 6%에서 많게는 8.5%가 넘는 고속성장을 해왔습니다. 올해도 지난해보다 13% 가량 늘어난 1095억 딸라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윁남 정부의 전망입니다.



사회 : 그렇군요. 지금까지 윁남의 개혁개방 배경과 그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시간부터 윁남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과정을 부문별로 살펴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윤성호 방송원 말씀 감사합니다.



윤 :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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