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윤성호

공식 SNS

윁남 개혁개방의 배경

북한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8-27 18:23


사회 : 이번 순서는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시간입니다. 수령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간부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학생들과 함께,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방도를 살펴봅니다. 오늘부터는 윁남의 개혁개방 사례를 살펴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윁남이 개혁개방 할 당시 정치경제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도움 말씀에 윤성호 방송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윤 : 네, 안녕하십니까?



사회 : 윁남이 개혁개방을 실시하기 이전의 경제 상황이 궁금한데요. 어땠습니까?



윤 : 윁남은 공산당이 통일을 이룬 직후인 1976년부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통일된 윁남에서의 사회주의경제체제 도입을 서둘렀습니다. 크게 두 가지가 핵심이었습니다. 농업 부문에서는 국가가 토지를 몰수해 협동농장을 운영하는 것이었구요. 상업부문에서는 자본주의 상업(자유시장경제)을 폐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사회주의 경제를 실시한 직후, 참담한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농업 부문에서 문제점이 크게 나타났는데요. 농업 생산량이 크게 떨어지고 인민들이 굶주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 북부 윁남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실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만 남부 윁남의 토지개혁과 농업협동화가 크게 실패한 리유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윤 : 통일정권은 남부 지역에 토지개혁과 협동화 정책을 강압적으로 실시했습니다만,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추진했던 정책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문제점이 나타날 것으로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중북부와 남부는 실정이 크게 달랐습니다. 중북부의 농업은 토지가 작고, 소작농과 가난한 령세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토지를 몰수하고 협동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저항도 적었고, 협동화를 실시한 후 농업생산성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부 지역은 메콩강 류역을 중심으로 하는 곡창지대였는데요. 북부처럼 소작이나 령세농보다는 자작농 위주였습니다. 또, 북부지역은 농민들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남부지역 농민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협동농장으로 묶어서 관리하기도 어렵고, 억지로 묶어서 관리하게 되면 생산력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죠.



사회 : 사회주의 농업제도가 실시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오히려 떨어졌다는 것인데요. 상업이나 공업부문은 어땠습니까?



윤 : 상이나 공업 부문도 실패했습니다. 통일정권은 1979년, 매판자본가 근절과 개인이 운영하는 상공업자본을 개조한다는 내용의 <결의문 254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개인이 운영하는 상공업과 상점 등록제, 화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자본가의 자산 압수, 통화개혁, 개인금융 금지와 같은 내용을 담은 혁명적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상업도 공업도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비사회주의적인 장마당이 널리 성행했습니다. 공업도 생산력이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가 더욱 어려워졌고, 수많은 인민들이 배를 타고 윁남을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사회 :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고, 인민들이 윁남을 탈출할 만큼 먹고사는 것이 헐치 않았다는 말씀이신데요.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어땠습니까?



윤 : 정치적 상황도 좋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1978년 윁남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노골적인 반윁남 정책을 실시한 크메르루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캄보쟈를 침공했습니다. 이듬해 1979년에는 중국이 이에 반발해 중국과 윁남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연이어 벌어진 두 나라와의 전쟁으로 윁남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결국 1976년 시작된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윁남 경제를 무너트릴 정도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회 : 보통 그 정도로 경제가 망가지고, 정치적인 혼란이 발생한다면, 그것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윤 : 그렇습니다. 경제정책이 실패하자, 곧바로 집권세력 내부의 정치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남부 출신이 중심이 된 개혁파는 경제파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혁과 개방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북부 출신이 중심인 된 공산당 보수파들은 "자유주의에 물든 경제정책이 실패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경제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사회 : 보수파와 개혁파의 투쟁이 벌어진 셈이군요.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윤 : 두 진영 사이의 갈등은 1982년 3월 열린 공산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결국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대회에서 량측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자는 데 대해서는 뜻을 같이는데요,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전당대회에서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응우옌반린이 정치국 위원에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사회 : 그렇다면, 개혁세력이 패배했군요?



윤 : 그렇습니다. 1982년까지는 개혁파가 당 대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못하면서 보수파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1984년부터 상황이 급변하면서 개혁파가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도권을 쥔 개혁파는 1985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8기 회의에서 가격, 임금 및 통화개혁의 즉각적인 실시를 의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회 : 개혁파가 추진한 정책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윤 : 과거의 경제정책이 주로 농업과 농촌에 집중되었는데요. 개혁파의 경제정책은 공업과 도시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우선 배급제와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생산하고 분배하는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인민들이 시장에서 요구하는 만큼 생산하고, 인민들은 생산된 물건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시장을 통해 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경제관리 방식이 통제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바뀐 것입니다.



사회 : 불과 2년 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윤 : 개혁파가 갑자기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공산당의 일부 핵심 간부가 개혁파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1세대 지도자인 레주언 당서기장이었습니다. 레주언은 호찌민 전 주석, 응우예잡 장군, 팜반동 전 총지, 쯔엉찐 전 당서기장 등과 함께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무장 항전을 이끈 지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시기인 1945년부터 1951년까지 남부에서 항전을 지도했습니다.

레주언은 원래, 공산주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정권의 경제정책이 실패하자, 정책의 오류를 시인합니다. 그 후 개혁파 옹호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사회 : 당의 원로급 지도자가 개혁파를 지지했으니, 개혁파의 입김이 다시 거세졌겠군요?



윤 :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레주언이 개혁파를 지지하고 나선 지 1년 후인 1986년 7월에 레주언이 사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개혁파 진영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윁남 정치에는 그 동안 레주언을 등에 업고 세를 불려온 개혁파가 그 여세를 모아 개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그해 12월 예정된 제6차 전당대회에서 당서기장 후보로 보수파인 쯔엉찐이 유력하다는 말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 개혁을 계속할 것인지를 놓고 본격적인 정치투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중요한 시점이었군요. 제6차 전당대회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보수파인 쯔엉찐이 당서기장에 올랐습니까?



윤 : 쯔엉찐이라는 이름은 원래, 중국공산당이 감행했던 장정에서 따온 것입니다. 쯔엉찐은 자신의 이름을 장정이라고 지을 정도로 철저한 모택동 주의자였습니다. 당대회에서는 결국 쯔엉찐이 서기장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인민들은 개혁이 좌절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사업에 개혁정책을 실시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키면서, 당내 보수파에 맞서 치열한 노선투쟁을 진행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쯔엉찐이 당 서기장에 오른지 불과 5개월 만에 보수파와 개혁파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보수파가 아니라 개혁파였다는 것입니다. 개혁파는 인민들의 지지와 당내 양심있는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 개혁파의 승리했다면 쯔엉찐은 어떻게 됐습니까?



윤 : 쯔엉찐은 같은 혁명동지인 레둑토, 팜반동과 함께 지도부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들은 통일 이후 나타난 경제난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실상 축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 80대 원로들이 동시에 퇴진하면서, 응우옌반 린이 최고 실권자인 서기장에 올랐습니다.

6차 전당대회에서는 윁남 개혁정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도이모이 정책이 탄생했습니다. 당대회 5개월 후에는 보수파와의 투쟁에서 개혁파가 주도권도 쥐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윁남 공산당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공산당 지도부의 실수와 능력부족을 인정했고, 정책실패에 대한 당 지도부의 책임을 확실하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 응우옌반린 서기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어떤 변화들이 생겼습니까?



윤 : 개혁파는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았습니다. 응우옌반린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개획을 추진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실천적 정책으로 도이모이 정책을 천명했습니다.



사회 : 도이모이 정책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윤 : 우리말로는 ‘도이’는 바꾼다는 뜻입니다. 모이는 새로운 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죠.



사회 : 윁남식 개혁개방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이모이 정책의 근본적인 목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윤 : 크게 다섯가지로 요악할 수 있는데요.

첫째, 생산을 우선 순위에 둔다는 것입니다. 곡물과 인민들의 생필품 생산을 늘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경제사업의 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둘째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전형적인 특징인 중공업 부문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대신 경공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선 당장은 인민생활을 끌어올리는 데 힘을 쏟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사회 : 세 번째는 어떤 것입니까?



윤 : 셋째는 정부가 정해준 가격을 인민생활에 맞게 현실화하고, 소규모 기업소나 가족끼리 물건을 만들어 파는 활동을 자유화했습니다.



사회 : 경제자유화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나머지는 어떤 내용입니까?



윤 : 넷째는 각 기업소나 가족 기업들에게 생산에 필요한 보조금을 대주었습니다.



사회 : 기업소들에게 세금을 걷는데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을 돕는데 초점을 맟춘 셈이군요?



윤 :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계획경제를 시장경제 체제로 바꾸고, 비공산권 국가들과 새로운 경제협력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장경제란 한마디로 자본주의 경제라고 할 수 있는 데요.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고 자본주의 나라들과 경제협력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 경제를 사실상 버리겠다는 정책이었던 것이죠.



사회 : 대단히 급격한 개혁조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윤 : 그렇습니다.



사회 : 당시는 아직 사회주의 나라들이 완전히 무너진 시기가 아니었는데요. 자본주의 나라들에게 자국 경제를 전면 개방하는 과감한 정책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윤 : 그렇겠죠. 그러나 당 지도부가 대외개방쪽으로 방향을 급하게 바꾼 것은 급변하기 시작한 국제정세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통일 직후에 윁남은 화교들을 축출하고, 곧 이어 캄보쟈 침공을 벌이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윁남의 유일한 버팀목은 쏘련이었는데요. 버팀목이었던 쏘련마저 1986년에 미하일 고르바초브 당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개방과 개혁을 주창하고 나서게 됩니다. 그 때문에 윁남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해 큰 성과를 거두고 있던 때였습니다. 사회주의권 국가들로부터의 지원이 사실상 중단되거나 크게 감소한 상태였기 때문에 윁남도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윁남 나름대로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선택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개혁개방을 선택하지 못한 조선 당국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이모이 이후, 사회주의 경제를 완전히 버리고, 개방도 전면적으로 실시하게 된 것인가요?



윤 : 그렇지는 않습니다. 돈도 없고 기술도 없고, 국내 경제마저 파산 지경에 이르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윁남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결국 서방진영과의 관계를 개선해 서방세계의 돈을 끌어들이는 길 뿐이었습니다. 서방세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개혁과 개방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개혁파는 매우 실용적인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진행하고 개방의 폭도 조금씩 늘리는 방식으로 추진했습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는 교훈을 알고 있었던 셈이죠.



사회 : 그렇군요. 오늘은 윁남 개혁개방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윁남 개혁개방의 배경 가운데 오늘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지금까자 윤성호 방송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윤 : 네, 감사합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