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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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의 진실, 첫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9-23 18:23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이어서 3년 동안 계속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북과 남의 분단을 더욱 더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1950년 6월 25일,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조선반도는 잿더미가 됐고 수백만이 목숨을 잃었다. 1000만이 넘는 리산가족이 발생하는 비극까지 초래됐다. 그때로부터 어언 6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는 전쟁이 가져다준 고통과 상처가 깊숙이 남아있다.



오늘날 북과 남은 끔찍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털어버리고 하루빨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 첫걸음은 오늘날의 비극을 가져온 6. 25전쟁에 대한 반성과 청산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6. 25전쟁은 누가, 무엇 때문에 일으켰는가? 이에 대해서 북과 남은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11년 6월27일 조선중앙방송위원회가 제작한 기록영화 ‘6.25’의 일부 내용이다.



삽입: 조선중앙방송위원회 6.25기록영화(14:13~14:34초) :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괴뢰군은 3.8선 전 전선에 걸쳐 5킬로 메터 지점까지 불의에 침공하였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아니 될 불행과 고통, 죽음의 날은 무섭게도 들이닥치구야 말았다. 1950년 6월25일.



북조선 당국은 지금까지 6. 25전쟁은 남조선이 먼저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남조선은 ‘6.25는 남침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남조선 KBS 방송이 6.25전쟁 60돐을 맞아 제작한 기록영화 ‘조선전쟁’을 잠시 살펴보자.



삽입: 이전에도 3.8선에서 잦은 충돌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인민군은 서쪽의 웅진반도로부터 개성, 춘천, 강릉에 걸쳐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력사는 ‘6. 25전쟁은 김일성이 치밀하게 준비해서 일으킨 기습적인 남침도발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이 제안한 6.25전쟁을 승인하고 또 지원한 쏘련의 자료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쓰딸린이 사망한 후 쏘련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된 흐르쇼브의 회고록에서 6.25전쟁이 남침전쟁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회고록의 일부 내용을 성우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삽입(성우) : 1949년,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쓰딸린을 찾아와 남침승인을 받고저 했다. 그의 주장은 남조선에 일격을 가하면 남조선에서 내란이 발생해 리승만 정권은 빠른 시일 내에 붕괴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쓰딸린은 신중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다시 오라고 했다. 김일성은 몇 달 뒤 새 계획을 가지고 다시 찾아왔고 전쟁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자신했다. 쓰딸린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하면서 중국 모택동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모택동은 그건 어디까지나 조선의 국내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북남전쟁이 확정되었다. 즉 6. 25전쟁은 처음부터 김일성이 구상하고 도발한 것이었다.



흐르쇼브는 이 회고록을 1964년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 썼는데, 그가 죽고 난 뒤 1977년에야 미국 국무성에 의해 공개가 된다. 리념 대결이 치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때라 당시 흐르쇼브의 회고록은 객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1991년 쏘련이 붕괴되면서 6.25전쟁 관련 기밀문서들이 공개되자 흐르쇼브의 말이 사실로 증명됐다.



실제로 김일성은 1949년 3월 쏘련을 방문해 쓰딸린에게 처음으로 남침전쟁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다. 쓰딸린은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남침을 허용될 수 있다면서 반대했다. 대신 쓰딸린은 북조선과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해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당시 김일성은 쓰딸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쏘련의 지원에 감사를 표시했다.



김일성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대표단은 우리에게 뜨거운 환영과 만족한 교섭결과에 대하여 쏘련 정부와 스딸린 대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위대한 쏘련 인민과 조선 인민과의 영구불멸한 친선 만세, 영웅적 쏘련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이 쓰딸린 대원수 만세.



1949년 조.쏘 경제문화협정이 체결된 직후 쏘련은 북조선에 막대한 규모의 무기를 지원한다. 당시 쏘련은 8000톤급 배에 무기를 싣고 북조선에 도착했는데, 이 무기를 인수하고 인양한 최태환 인민군 력사기록부장은 11개 차량을 탄 렬차가 일주일간 무기를 실어 날랐다고 증언했다.



최태환 : “거기서 인양된 것이 그 당시 무전기, 대포, 사이드카 이런 것을 보통 한 렬차가 열 한 렬차인데 일주일 실어 올렸어요.



김일성은 1949년 8월에 남침전쟁을 승인받기 위해 또다시 쏘련을 방문하지만 이번에도 쓰딸린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둬 조선반도에 개입할 수는 여지가 생기자 쓰딸린의 태도가 달라졌다. 또한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연설을 통해 조선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자, 쓰딸린은 김일성이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마침내 전쟁을 승인했다.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승인하고 전쟁 물자를 지원해준 쏘련의 기밀문서가 폭로되면서, 그 동안 계속돼오던 6. 25전쟁 도발자에 관한 론쟁에 종지부가 찍혔다. 전쟁 당시 100만 명의 지원군을 보낸 중국까지도 지난 1996년 7월에 개정·발간한 력사 교과서에서 6. 25전쟁에 관한 기록을 '남조선의 북침'에서 '북조선의 남침'으로 수정했다. 쏘련과 중국도 인정한 6.25전쟁의 진실을 오로지 김정일 정권만이 부인하고 있다. 이번 ‘6.25전쟁의 진실’ 편을 통해 김정일 정권이 감추고 있는 력사적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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