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제40부 김정남의 스위스 류학생활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김정일의 장남인 정남이를 위해서 제네바 교외의 레만 호숫가의 고급주택가에 있는 단독주택 한 채를 샀다. 그곳은 스위스 제네바에서도 집값이 제일 비싼 곳이라고 했다. 풍경이 매우 좋았는데 집터가 2천 5백 평에 주택넓이가 5백 평쯤 되는 단독주택이었다. 당시 2백만 딸라를 주고 샀다고 들었다. 준비가 갖춰지자 우리는 80년 가을, 입학식을 앞두고 제네바로 갔다.



정남이의 행차는 요란했다. 이모와 어머니, 외할머니와 내 동생 남옥이도 동행했다. 남옥이는 정남이와 함께 국제학교에 넣을 예정이었다. 김정일의 지시였다. 정남이 혼자 보내는 것보다 사촌누나인 남옥이와 같이 학교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 같다. 남옥이를 딸처럼 예뻐한 김정일의 배려도 있었을 것이다.



해설 : 리일남의 어머니 성혜랑은 자신의 수기에서, “제네바행 대부대”라는 표현으로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혜랑 : 비행기 1등실을 다 차지하고 그 뒤에 붙은 ‘보조 1등석’까지 우리 집 성원들로 메워졌다. 김정일 비서는 자기의 섭섭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머리 수로, 든든한 머리 수로 수행원을 늘렸다. 중앙당 부부장이 세 명, 사진기사, 영화기사, 운전사, 수행원이 ‘사우디 왕자행차 일행’만큼 많았다.



수행원으로는 책임부관 김규채와 경호원들이 따라 붙었고, 요리사 송영봉과 함께 정남이를 보살필 아줌마 두 명이 따라갔다. 관저 운전수 박태준도 따라 갔는데, 벤즈 450과 도요다 차를 미리 사놓았다.



처음 제네바로 갈 때 20만 딸라를 김정일이 주었고, 그 후로는 한 달에 평균 5만 딸라씩 경비를 쓰기로 허락 받았다. 우리 일행은 일단 모스끄바로 갔다. 학업을 계속해야 하는 나는 모스끄바에 남고, 나머지 식구들은 제네바로 갔다. 혜림 이모는 아들 정남이가 입학하는 것이라도 보고 오겠다고 따라갔었다.



입학식 하던 날 수행원들을 긴장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입학식은 국제학교답게 학생들이 각기 제 나라 국기를 들고 참석했는데, 정남이만 깃발을 안 들고 서 있었다. 당시 남조선 대사가 로신영이었는데, 입학식에 왔던 로신영 대사가 깃발 없이 서 있는 동양 애를 보고 다가갔다. 뒤에 서 있던 규채와 경호원들이 바짝 긴장했지만, 주시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로신영 : 꼬마야, 깃발도 없이 왔구나. 어느 나라에서 왔니?



김정남 : 평양서 왔시오.



로신영 : 뭐, 어디라구?



김정남 : 피양서 왔다니까요.



로신영 : 어, 그렇구나. 아주 똘똘하게 잘 생겼구나. 공부 열심히 하거라.



평양에서 왔다는 말에 로신영 대사는 깜짝 놀랐지만, 정남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갔다는 것이다. 내가 남조선 서울에 와서 그 얘기를 했는데, 당시 안기부장이 로신영이었다. 내 얘기를 전해 들은 로신영 부장은 제네바에서의 일이 기억난나고 얘기했다고 전해 들었다.



정남이의 류학생활이 시작됐다. 매일 아침 정남이는 남옥이와 함께 학교에 갔다. 머리도 서양 애들처럼 길렀다. 내가 가끔 스위스에 놀러 가서 보면, 정남이는 수업이 끝난 후에 친한 외국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공부하고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도 했다.



몇 달 후에 가보니 정남이가 어느 정도 프랑스어를 했다. 남옥이도 프랑스어를 잘했다. 81년 여름방학 때 스위스에 갔는데, 정남이의 불어는 유창한 수준으로 올라 있었다. 스위스는 물론 오지리의 빈 등 여러 곳을 놀러 다녔는데,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통역을 해줬다.



정남이는 제네바에서 2년 가까이 공부하다가 철수했다. 집 부근에서 남조선 자동차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단독주택에는 최첨단 전자 방범장치가 돼있었고, 밤이면 규채와 경호원이 울타리 안팎을 순찰했다. 그러던 중 남조선 대사관 차가 부근을 왔다갔다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부근에 남조선 대사관 사람이 살 수도 있었다. 정남이의 주택을 감시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눈에 띄는 대사관 차량을 이용할 리유가 없었다. 그런데 리철 국장이 남조선 놈들이 눈치챈 것 같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성혜랑 : 리철 국장, 적에게 포착됐다는 말이 사실이에요?



리철 :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으로 꺽여 들어오는 골목 모퉁이에서 항상 검은 차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밤에 정원에 사람들이 들어왔던 흔적도 발견했습니다.



성혜랑 : 어쩌면 좋지요.



리철 : 아무래도 집을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어머니와 의논 끝에 클로벨몽에 있는 고급아빠트로 집을 옮겼다. 이 아빠트는 1백50만 딸라를 주었다고 하는데, 어머니 일행이 제네바를 탈출할 때까지 살던 곳이다.



집을 옮긴 후에도 불안하여 평양에 보고하고 제네바를 떠났다. 일단 철수하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네바에서 철수는 하되 평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모스끄바로 철수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올렸다.



해설 : 제네바 국제학교에는 외교관 자녀들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대사관 차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북과 남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남의 보호자인 성혜랑으로서는 사소한 일도 민감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김정남의 스위스 류학생활이 빨리 끝난 것은 리철 당시 ‘제네바 주재 대표부 공사’가 위험을 부풀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신주의가 작용했다는 말인데, 성혜랑의 이야기를 들 어보자.



성혜랑 : 리철 국장의 철수작전 공세에 못 이겨 스위스에 들어간지 1년 반 만에 우리는 애들을 데리고 모스끄바로 나오게 되었다. 서방이 처음이었던 리철도 무지해서 겁에 질려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가 제네바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 책임상 불리하다고 생각했던 리철은 유치할 만한 유도작전으로 제네바에서 우리를 끌고 나왔다.



정남이 일행과 나는 일단 평양으로 돌아가고, 리철이 제네바 국제학교의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모스끄바의 최준덕이 모스끄바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부설 학교의 입학 수속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 모스끄바로 다시 나왔는데, 남옥이와 정남이는 프랑스 대사관 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스위스로 갔다. 그때가 9월인데, 나는 며칠 뒤 스위스에서 사라진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