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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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부 김정일의 자식교육, 첫 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다시 김정일의 장남인 정남이 얘기로 돌아가자. 정남이의 교육문제인데, 내가 조선을 탈출하고, 또 이번에 어머니 일행이 망명을 결행한 곳이 스위스 제네바다. 제네바는 정남이의 교육문제 때문에 자리잡은 곳이다.

정남이는 평양 관저 생활을 따분해 하고 갑갑해 했다. 매일 수행원들인 규채와 문길이, 철수하고만 노니 그럴 법도 했다. 또 공부를 시작할 나이도 됐기 때문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선발해서 같이 생활하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일종의 간이학교를 관저 안에 만들자는 것이다.



해설 : 김정남의 교육 문제로 어머니 성혜림을 비롯해 그의 이모와 외할머니가 속을 태웠다. 더구나 김정남은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자식이라 비정상적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김정남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던 이모 성혜랑의 수기를 살펴보자.



성혜랑 : 정남은 울타리 바깥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어울려 뛰어 노는 즐거움을 모르고 기형적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아이를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제 아버지의 처지를 우리는 리해하고 있었지만 이 비정상적 생활을 강요하고 있는 그를 찬성할 수 없었다.



정남이가 7살 때인 77년의 일이다. 똑똑하고 깨끗하고 건강한 아이들을 선발해서 작은 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평양시 거주자 중 녀자 5명 남자 4명을 뽑았다. 학생을 뽑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호위사령부 2호위부가 주관해서 출신성분 좋은 집 아이들 중 잘생기고 똑똑하고 건강한 아이들을 뽑았다. 사람을 선발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했을까는 상상에 맡긴다.



그 아이들은 관저에서 생활하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같이 공부하고 놀았다. 토요일에 집에 보냈다가 일요일 오후 다시 관저로 데려왔다. 관저 차량이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왔는데, 아이들이 관저에 들어올 때면 신체검사를 다시 했다.



아이들이 집에 갈 때는 사탕과 과자, 고기를 잔뜩 싸서 보냈다. 부모에게도 술, 양복지, 고기통조림 등 하사품을 가득 트렁크에 넣어보냈다. 부모들은 자식 덕에 호강하는 거였다.



교실은 오락실에 만들었다. 책상을 만들어 녀자 어린이와 남자 어린이를 짝꿍이 되게 앉혔다. 산수와 국어, 김일성역사 등 평범한 과정을 시작했다. 물론 놀 때도 같이 놀았다. 관저에는 놀이동산도 있고, 작은 동물원도 있었으니, 선발된 어린이들에게는 천국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토요일에 나갔다가 일요일에 들어오는 과정부터 문제였다. 올 때마다 신체검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은 그런 대로 참을 만했지만, 끊임없이 나불대는 꼬마들의 입을 막을 길이 없었다. 김정일 왕족에 대한 비밀로출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간이학교는 두달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해설 : 리일남에 따르면 남조선 사람들은 정남이를 일반 유치원이나 학교에 안 보냈는지를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남조선에서는 대통령의 아들도 일반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정남이를 비롯해 다른 자녀들도 인민들과 철저히 차단시킨 채 교육을 시켰다. 이것은 우상화선전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가계를 신비화 해왔기 때문에 자녀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게 드러나는 걸 꺼리는 것이다.



그때부터 정남이 교육문제가 발등의 과제로 떨어졌다. 관저 안에 가정교사를 초빙해서 특수교육을 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밖에 내보내 일반 인민학교에 보낼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모나 어머니는 국내에서의 교육을 원치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교육을 안 시킬 수도 없고, 그런 론의과정을 거쳐 류학이 결정되었다. 이 모든 걸 구상한 사람이 우리 어머니였다.



혜림 이모는 몸이 아파 정남이 교육문제를 어머니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어머니가 외할머니와 함께 김정일에게 강력하게 요청, 류학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어디에 있는 어떤 학교를 보낼 것인가도 사람들을 파견, 상당히 오랫동안 조사했다.



해설 : 김정남의 교육 문제와 관련해서는 리일남의 어머니 성혜랑이 정확히 알고 있다. 당시 리일남은 모스끄바에서 류학중이었기 때문에 전해들은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남의 교육은 외할머니 김원주의 주도로 추진됐다. 성혜랑의 이야기다.



성혜랑 : 어머니의 구상은 시간을 놓치지 말고 정남이를 정규교육에 넣기 위해 모스끄바로 떠나야 한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어머니께서 지도자 동지에게 ‘모스끄바에 가서 제 엄마와 같이 설을 쇠고 왔으면 좋겠다’고 청을 올렸다. 그때 형편에서 제 아버지에게서 정남이를 떼어 외국으로 공부를 떠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김정일 비서는 그 아들을 품에서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6개의 보초 차단막이 있는 관저 안에서 8년 동안 갇혀 있는 정남이를 데려내 오기 위해 어머니가 기울인 그 열성과 집념은 무기 징역을 받은 사람을 석방하기 위한 것보다 더 어려운 투쟁이었다.



류학의 원칙이 결정되었다. 평양에서 가르쳐서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기 쉽고, 앞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를 하려면 바깥 세상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보낼 것이냐도 고민거리였다.



당연히 로씨야가 맨 처음 대상으로 올랐다. 그러나 로씨야는 안 된다는 결론이 쉽게 내려졌다. 로씨야는 잘 아는 나라였다. 크게 배울 게 없다는 것이었다. 남조선 통일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자본주의의 질곡 속에서 고생하는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키려면, 교육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도 가장 교육체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를 찾아야 했다. 거기다 김정일의 아들인 만큼 정남이의 신분에 걸맞게 고급이어야 했다. 여러 사람들이 학교 선택을 위해 노력했다.



해설 : 김정남이 류학을 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리일남이 과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우에 나온 성혜랑의 수기에도 나와 있지만 김정남이 류학을 가게 된 것은 조선 내에서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를 안타까워했던 김정남의 외할머니와 이모 성혜랑의 집념과 노력으로 류학이 성사된 것으로 봐야지, 후계수업을 위한 류학이라고 보기에는 과도한 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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