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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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부 비자금을 관리하는 김정일의 특파원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서울에 와서 조선 생활, 특히 모스끄바 생활을 얘기할 때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목이 있다. 돈 얘기가 특히 그렇다. 내가 얘기하는 돈의 단위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김정일 왕족이라고 하지만, 외화 사정이 어려운 조선의 현실로 볼 때 툭하면 1만 딸라를 얘기하는 내 말이 믿기 어렵다는 거다.



믿고 안 믿고는 내 소관이 아니다. 다만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리 조선이 어렵다 해도 유엔에 가입한 국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그곳의 최고 지도자다. 아프리카에 있는 가장 가난한 나라의 독재자가 망명할 때 얼마를 가지고 가는지는 신문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내 신분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의 장남을 낳은 부인의 하나밖에 없는 남자 조카였다.



해설 : 김정일은 국가경제에서 가장 기술장비가 좋고 외화획득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소들을 분리시켜 당경제를 만들었다. 당경제는 사실상 김정일 개인경제다. 또 김정일은 당을 리용해 ‘충성의 외화벌이 운동’을 벌려 외화벌이 사업을 독점하고 있다. 이런 김정일에게 몇 십만 딸라는 푼돈에 불과하다. 김정일처럼 막대한 자금을 탕진하는 지도자가 별로 없어서 남조선 사람들도 리일남의 말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모는 평양에 갔다 올 때마다 딸라를 들고 나왔다. 김정일이 쓰라고 주는 돈이었다. 매번 10만~15만 딸라 수준이라고 알고 있다. 이모의 돈은 김정일에게 받아 갖고 나오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러 나라에 나가 있는 대사들도 이모에게 돈을 바쳤다. 모스끄바 대사는 물론 동구라파에 나가 있는 각국 대사들이 평양에 들어갈 때 이모 보좌관 최준덕을 통해 돈을 바쳤다. 나는 오지리 대사를 겸하고 있던 이원범 체스꼬슬로벤스꼬 대사가 이모에게 돈을 바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대사 등 외교관만이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평양에 들어가려면,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반드시 모스끄바를 거쳐야 한다. 항공편이 그렇게 돼 있어 다른 길로는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공적인 업무로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모스끄바에 들러 이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갔다. 최고 권력자의 부인에게 인사하는 것은 독재국가 관료의 보신책이 아닐 수 없다.



권형록이라는 김정일의 ‘특파원’이 있었다. 특파원이라면 남조선 사람들은 언론기관의 특파원을 연상하는데, 조선의 특파원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김정일이 특별히 파견해 일을 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하는 일은 대개 김정일의 비자금 관리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다. 직속 부하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권형록은 중앙당 부부장급으로 공식 직책은 동부독일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다.



해설 : 리일남에 따르면 김정일의 자금관리 및 물건구입을 담당하는 특파원은 다음과 같다. 유럽의 독일 등 자본주의 나라를 책임지는 특파원은 권형록, 싱가포르 등 동남아세아를 책임지고 있는 특파원은 나중에 대성총국장을 한 백인수, 로씨야를 비롯한 동구라파 책임 특파원은 최준덕이다. 이들도 성혜림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바 쳤다.



권형록은 독일 특파원으로서 독일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벤즈는 모두 그 사람이 구입해 보냈다. 독일에서 장사하니까 권형록에게는 돈이 많았다. 벤즈를 수백 대씩 구입했으니 그에 따른 중개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권형록도 평양에 들어갈 때나 평양에서 나올 때나 모스끄바를 거치는데, 그냥 가는 경우가 없었다. 모스끄바를 지나갈 때마다 이모에게 들려서 문안인사를 드렸다. 문안인사도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봉투하고 같이 드렸다. 봉투는 보통 5만 딸라에서 10만 딸라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권형록은 또 이모 생신 때 벤즈를 선물하기도 했다. 김정일 몰래 꼬불쳐 둔 돈으로 샀을 것이다. 중계료로 한 대 받은 차를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남조선으로 나오기 전 이모가 자신의 차인 초록색 벤즈 280을 연초록색 450형으로 바꿨는데, 권형록이 선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이모는 벤즈 두 대를 새로 장만했다.



최준덕은 나에게도 돈을 조금씩 주었다. 이모에게 1만 딸라를 준다면, 나에게는 1천 딸라를 주고, 10만 딸라를 주면 나에게는 1만 딸라를 주는 식이었다. 그리고 대사 등 이모에게 돈을 바치는 사람들도 내 몫을 챙겨주었다. 1년에 두 번 정도, 1만 딸라는 받은 것 같다. 이모도 평양 나갈 때 내게 1만 딸라를 주고 가시기도 했다. 남자 주머니에는 돈이 있어야 든든하다고 하면서 주셨다.



해설 : 2009년 3월말 환율로 계산했을 때 100딸라는 조선돈 약 36만원이다. 지금 물가가 올라서 딸라 가치가 좀 떨어진 편이지만 지금도 1만 딸라는 큰 돈이다. 리일남이 류학생활을 하던 때는 1970년대이다. 김정일의 처조카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살펴보자.



모스끄바에 있을 때는 크게 돈 들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려행 때 많이 썼다. 녀자친구의 선물을 구입하는 데도 꽤 돈이 들어갔다. 나는 모스끄바에서 외국에 나갈 때마다 보통 1만 딸라 정도 가지고 나갔다. 비행기 왕복표와 호텔비, 그리고 옷가지 등을 사는 데에 그 정도의 돈이 들어간다. 저녁에 가는 고급술집에서는 꼬냐크 한 잔에 1백 딸라도 한다.



모스끄바에서는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주식과 부식은 평양에서 공급해주기 때문에 생활비가 드는 것도 아니다. 려행가면서 쓰는 게 소비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모의 경우 려행을 가도 현지 대사관 관계자들이 안내하니 려행에서도 물건 사는 것을 제외하면 돈 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모는 돈을 아빠트의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모가 평양에 나갈 때는 나에게 금고 열쇠와 비밀번호를 맡기고 갔기 때문에 나는 금고에 돈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모 방에 있는 금고는 내 키보다 약간 작은 높이였다. 그 안에는 미국 딸라와 영국 파운드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딸라는 1백딸라 짜리 1백장, 1만 딸라 묶음들이이었다. 금고 안에는 항상 1백만 딸라 정도는 들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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