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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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부 호화로운 류학 생활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당시 나에게 이모는 용돈으로 한 달에 5백 루블을 주셨다. 그것도 매달 주는 게 아니라 1년 치를 계산해서 미리 주셨다. 또 틈틈이 생각나실 때마다 돈을 주셨다.



해설 : 리일남이 쏘련에서 류학할 1970년대 중반 당시 조선 당국은 류학생에게 매달 70루블을 주었고, 연구생에게는 90루블을 지급했다. 뒤에 비용이 조금 올라 연구원과 류학생에게 각각 100루블, 90루블을 지급했다. 이와 비교했을 때 비정기적으로 받은 용돈을 제외하더라도 리일남은 몇 배의 돈을 받은 것이다. 또 500루블이면 쏘련주재 조선 대사의 월급보다 많은 돈이다.



다른 류학생과 연구원들에게 지급되는 돈으로는 기본 생활도 빠듯했다. 외식은 생각할 수도 없으니, 아무리 입에 안 맞아도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류학생들은 평양에서 해주는 양복 비슷한 교복을 입고 다녔다. 로씨야에 입을 옷도 변변히 없는 데다 사 입을 수 있는 여력도 안됐다.



한 가지 말해둘 것은 조선 류학생들은 가끔 있는 로씨야 학생들의 연회에 못 가게 돼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가라고 해도 돈이 없어 갈 수도 없었다.



모스끄바 주재 조선 대사관 사람들의 생활도 빠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모스끄바에서 공부할 때 대사 월급이 4백 50루블이고, 직원들은 평균 3백 루블을 받았다. 생활하기도 힘든데, 평양의 친척들로부터 뭘 사보내라는 부탁은 끊이지 않는다. 외국에 나간다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니, 사돈의 팔촌까지 친척이라는 친척은 모두 부탁한다. 돈을 주면서 하는 부탁도 아니다. 특히 마이싱, 페니실린 등 약품 부탁이 많다. 이런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다. 약품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관 부녀자들은 주말에 모스끄바 근교에 가서 고사리를 딴다. 모스끄바 사람은 고사리를 안 먹기 때문에 고사리는 지천으로 깔려 있다. 자기들만 먹는 게 아니다. 가족들에게 먹이기 위해 말린 고사리를 기차편으로 평양에 보낸다. 대사관의 주 반찬이 고사리다.



해설 : 조선에서 외교관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조선내부에서나 그런 대접을 받지 외국에서는 북조선 외교관만큼 불쌍한 사람들도 없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 나가 있는 외교관들은 해당 나라의 일반로동자들보다 생활수준이 낮다. 현지의 물가수준에 비하면 월급도 적고, 그나마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남새를 키워 생활비를 마련하거나, 마약이나 위조딸라 유통, 기타 비법적인 활동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도 한다. 전임 당비서들과 보위원들이 2중으로 감시하기 때문에 자유도 없다.



내가 받는 돈은 그뿐이 아니었다. 이모는 루블로 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며, 외환상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한 달에 천 딸라 정도씩 주셨다. 지금도 로씨아에서 천 딸라라면 엄청난 돈이지만, 당시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더구나 어린 나에게는 다 쓸 수도 없는 돈이었다.

생활이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0대 후반의 학생 신분인 내가 벤즈를 몰고 학교에 다녔다. 내 차는 이모 차보다 좀 작은 벤즈 230형이었다. 휘발유는 이모가 표로 주셔서 나는 휘발유 넣을 돈도 들지 않았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우리의 생활필수품이 평양에서 공급됐다는 사실이다. 한 주일에 한 번씩 모스끄바-평양간의 정기 항공로를 통해 필수품이 전달됐다. 모스끄바에서는 구할 수 없는 필수품들이 많았다. 당장 쌀만 해도 모스끄바의 쌀은 안남미 같아서 퍼슬퍼슬하고 맛이 없었다. 배추도 양배추만 있지, 조선 배추는 구할 수 없었다. 당시 쏘련 대사관 사람들은 양배추로 김장했는데 김치 맛이 나올 수 없었다. 나도 대사관 직원들 집에 초대됐을 때 양배추 김치를 먹어봤지만 정말 맛이 없었다. 고추장이나 된장 등도 없었다.



그때는 어린나이에 음식투정을 했다. 그들은 우리를 초대해 놓고,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모두 쏟았을 것이다. 갖은 정성으로 차린 음식이 그 정도였는데.... 평상시에 그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대사관 부인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 대사관 직원들이 이렇게 먹고 살 정도였으니 조선 인민들의 생활은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해설 : 김정일을 비롯해 그의 가족들은 조선에 있든 외국에 나가든 최고의 식자재를 공급받는다. 1988년부터 13년간 김정일의 전속 료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를 잠시 살펴본 뒤, 리일남이 어떻게 식생활 문제를 해결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후지모토 : 김정일이 무엇을 사오라고 할 때마다 항공편을 리용해 음식 재료를 사러 갔다. 싱가포르에는 과일을, 로씨야와 이란에는 ‘소금에 절인 철갑상어 알’을 사러 갔었고, 그 밖에 중국과 유럽, 일본에도 자주 다녀왔다. 일본에서는 주로 생선을 구입했다. 질 좋은 다랑어와 고영희 부인이 좋아하는 물오징어 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전부 1,200㎏이나 되는 양을 구입한 적도 있는데, 그때는 운반하는 데 드는 운송료만도 엄청났다.



모스끄바의 살림을 담당하는 최준덕이나 명순 아줌마는 필요한 물건을 평양의 15호 관저로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평양의 리수헌이 호위총국 2국에서 타다가 매주 20~30개의 상자로 포장해 보내줬다. 평양에서 보내는 물건은 쌀이나 야채 부식뿐만 아니라 과일, 생수까지 포함돼 있었다. 쌀도 보통 쌀이 아니라 문덕쌀을 보내줬다. 요즘 남조선에서 수입하고 있는 신덕샘물도 모스끄바로 공수됐는데, 김정일왕족용은 일반 수출품과 다르다는 것은 이미 얘기했다.



평양에서는 상추, 파, 마늘, 사탕가루(설탕), 고추장, 된장에 단고기(개고기) 통조림까지 보내줬다. 과일도 딸기, 수박, 참외 등 계절마다 보내줘 바빌로바의 아빠트에는 없는 과일이 없었다. 평양에서 정기 항공편이 도착하는 날이면 운전수 박소웅과 최준덕이 비행장에 가서 짐을 찾아왔다. 짐을 주방에 갖다주면 주방 옆 한쪽 방에 설치돼 있는 랭동실에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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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6 16:32

    헤헤헤 나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체류했을때 북한대사관에 몇번가봐서 잘 알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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