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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5화 김정일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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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8




나는 어머니가 관저에 들어가신 후에도 아버지를 모시고 아이들과 경림동 일반 아파트에 직장을 가지고 살았다. 운전수가 어머니 쪽지편지를 이따금 전해주고 그 편에 나도 집 소식을 알렸을 뿐이다.



정남의 교육문제를 어머니가 제기하셨을 때 아이의 부모는 외부에서 교사를 끌어들이는 것보다 이모를 채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합의를 보았다. 이것이 내가 관저에 들어가게 된 이유였다.

우리는 직경2.5미터의 원탁에서 김정일 비서의 세 식구와 어머니, 나의 식구가 동석식사를 했다. 여염집에서도 가장은 따로 상을 차리던 우리 습관과는 다른 이런 동석식사가 서구적이라는 생각보다 인민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의 아들은 학원에 가 있었고 후에 곧장 유학을 갔기 때문에 기본 세 식구 외에는 할머니와 나와 나의 딸 모두 여섯 명이었다.



혜림이 모스크바에 오래 입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들과 함께 우리 세 식구를 상대로 식사시간과 식사 후 한때를 보냈다. 그는 할머니의 옛이야기, 나의 직장생활 등을 귀담아 듣곤 했다.



차츰 나는 누구도 감히 말 못하는 사정을 쉽게 아뢰는 데 익숙해졌다. 그것은 내가 아첨 없이 사회실정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그가 호의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왕과 접촉하는 데서는 관례를 벗어나지 말아야한다는 괴테의 말을 빌려 내가 지나쳐 실수하지 않도록 넌지시 일깨우시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80년 자신의 인생경험으로 김정일 비서는 순수한 인간이며 인지력과 인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계셨다. 젊지도 예쁘지도 않은 이모가 그 까다로운 지도자의 눈밖에 나지 않은 것은 나의 장점보다 지도자의 독특한 면이라고 보셨다.



어머니는 “저 사람은 불쌍한 것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 하시며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네 처마 밑에 와서 살고 있는 나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을 하셨다.



혜랑: 선생님, 잘 다녀오세요.



혜림: 여보, 조심히 다녀오세요



1970년대 어느 봄날 어스름 달 밤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정일비서가 사슴사냥을 나간다고 저녁을 먹은후 호기있게 떠났다. IN현관에서 배웅하고 혜림이와 함께 되돌아 들어오는데 홀가분해진 혜림이가 “오니노 이누마디 센따꾸요”라고 했다. 옛날 일제 때 국어교과서에 있던 옛말이다. 도깨비에게 잡혀온 아낙네들이 도깨비가 출정나간 사이에 모처럼 숨을 돌리며 어울려 개울가에 빨래 나가면서 하는 말이다. ‘도깨비 없는 틈에 빨래한다.’ 참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는 두 다리를 뻗고 그 애 침실에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무언가 가져다 먹고 있었다. 사냥을 나가면 먼데 가는 경우는 며칠도 걸리고 가까운데 가도 그가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다는 이유만으로 혜림은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김정일: 여보, 여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현관에서 “여보, 여보” 찾는 그의 목소리가 났다. 우리는 후다닥 놀라서 나는 뒷 복도로 나오고 혜림은 그를 맞으러 현관 쪽으로 나갔다. 웬일이냐고 마중하는 혜림에게 지도자는 “사고 났어, 가만”하며 당황한 기색으로 전화통 앞에 다가갔다. 혜림은 전화통에서 멀찌감치 서서 묻지도 못했다.



김정일: 남산병원 산부인과 바꾸라....낳았소? 무사해? 에미두? 모두 살았어? 아, 됐어 에이 어떻게 놀랬던지...후..” 얼마나 놀랐으랴 싶어서 입을 못 떼고 위로 삼아 가까이 서있기만 하는 혜림에게 그는 안도의 숨을 돌리더니 밑도 끝도 없이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었다. “연기: 망할놈의 새끼들... 말을 해야 알지. 지금이 사슴 분만기라고. 사냥금지를 말해줘야 할게 아니야...”



그제야 혜림은 그가 다치게 한 것이 사람이 아니라 사슴인줄 알았다. 눈이 퀭해서 큰일을 저지른 듯 뛰어 들어온 젊은 날의 김정일. 나는 그가 아직도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해설: 작가의 바람과 달리 정치인 김정일은 잔인무도했다. 한 노동당 고위간부는 “그동안 김정일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개혁개방을 못할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리일남이 남조선에서 대남공작원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성혜랑의 믿음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문화적인 것을 좋아했고 지식을 돋보았으며 미를 좋아했다. 멋을 느낄 줄도 알았다. 그것은 곧 기분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 까다로운 감도를 맞추기는 힘들었다. 정중하고 수수한 멋, 품위를 보면 굳은 얼굴이 풀리고, 조금이라도 치사하고 너절한 것에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무엇이건 지나치면 밉살스러워 했고 미달되면 깔보았다. 방종한 여자는 수모했다. 가난하고 세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정치에 바빴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방임하였으며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는 무제한적인 권한과 호사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도 걱정도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본능만이 성장하였다. 세도처럼 교육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 나쁜 습관이 지속되면서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는 타락한 일이 없다.



해설: 작가는 김정일이 타락한 일이 없다고 했지만 리일남은 김정일의 연회가 상당히 난잡했다고 전했다.



이일남: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1974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측근자파티가 열렸다. 처음에는 심부름하는 여자들만 있는 남자들끼리의 술잔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짝이 등장했다. 이들은 전국에서 뽑혀온 조선최고의 미녀들로 지도자동지 공연실 소속이었다. 그들은 파티에서 캉캉쇼 등을 공연했을 뿐만 아니라 좌석에 앉아 같이 춤추고 술마시는 짝이 되었다. 파티에서는 남조선노래를 주로 불렀다. 또 주패놀이를 해서 벌칙으로 남녀를 불문한 옷벗기기를 자주했다. 술취한 상태에서 털깎기 놀이도 했다. 남자가 놀이에서 지면 머리를 깎고 여자가 지면 음모를 깎았다고 한다.



나는 문득문득 그가 가지고 있는 안목에 대해 해석해보곤 했다. 그 시원이 무엇일까? 사람의 안목은 일대에 이루어지는게 아니지 않은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그의 원색적인 행위와 조폭한 성격과 어떻게 병존하는가?



그의 윗대 김일성주석, 그의 할머니 강반석 여사, 할아버지 김형직 선생, 그의 부계는 20세기 초엽 우리나라의 일반수준으로 볼 때 지식층에 속했다.



김형직선생은 숭실중학을 나왔고 일본서 잡지를 주문해 보는 수준이었으며 의학에 조예가 있는 교육자였다. 강반석 여사네 집안도 지식층이었다. 그 시대문화를 전도하던 카톨릭신자의 집안이었다. 그는 이런 가계의 전통에서 허무하지 않게 태어났다.



그의 장점에 속하는 너그러움, 남을 좋게 대해주고 싶어하는 선심, 인정깊음은 그의 타고난 성격, 혈통에 속한다고 본다. 그를 나쁜 인간으로 보게 하는 과격함, 까다로움 등은 후천적 성격이라고 나는 보았다. 무제한 권력, 비교육, 어머니의 부재, 그 사회의 권위주의가 만든 성격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성격은 그에게서 종잡기 힘든 난해한 기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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