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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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선물관 화재 사건의 진실 2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김정일은 쪽잠과 줴기밥이야기, 야전리발과 야전식사에 대한 일화 등을 통해, 자신이 인민을 위한 복무의 한생을 바쳐가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삶은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삶이 아니라 안락한 생활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것은 1979년 평양시 보통강구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선물관 화재 사건’이 실증해주고 있다. 인민들에게 혁명적인 근면함을 강요하는 김정일, 하지만 그는 후계자 시절부터 자신의 피로를 회복하겠다며 ‘피로회복관’ 건설을 지시한다. 이 피로회복관은 ‘선물관’이라는 외피를 쓰고 비밀리에 건설되다가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사라진다. <추적 사건과 진실, 평양 선물관 화재 사건의 진실>



장성택은 김정일의 피로회복관 건설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자 이를 김정일에게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장성택의 요청을 받은 김정일은 즉각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특별지시란 것은 ‘33호건설’에 필요한 외화를 세계 각국에 나가있는 대사관들에 할당하여 분납하라는 것이였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외교부에서는 해외에 나가있는 대사관들에 1년의 기한을 주고 바쳐야할 외화를 할당했습니다. 중진국 이상의 나라에 있는 대사관은 20만 딸라에서 50만 딸라, 개발도상국에 있는 대사관은 사정을 고려하여 몇 만 딸라씩의 과업이 떨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던 외교관들은 뾰족한 수를 내지 않는 한 이 할당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실 주 업무가 외교인 외교관들에게 외화벌이를 시킨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외교관들은 변변한 지원을 받지 못해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체면 차리기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외교관들이 무역일꾼처럼 장사를 하는 등 경제활동에 뛰어들 수도 없었습니다. 공화국에서 ‘돈맛을 알면 머리가 썪는다’며 돈벌이를 못하게 한 것도 있었지만, 외교관들 자체도 ‘사회주의 혁명만을 생각’하는 고지식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김정일이 1년 안에 외화를 벌라고 내리먹인 것은 외교관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공화국을 대표하는 대사관들은 김정일의 지시를 관철하기 위해서 비합법적인 외화벌이를 벌리는 거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지 사정상‘보따리장사’ 수준의 외화벌이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화벌이 실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였습니다.



장성택 : 부부장 동무,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지시가 내려간 지가 언제인데 각 대사관들의 외화벌이 실적이 왜 이렇게 엉망입니까? 지시관철이 이렇게 안 돼서야 되겠습니까?



외교부부부장 : 장성택 동지, 그게.... 취급할 수 있는 물건이 워낙 적어서..



장성택 :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됩니까? 동문, 33호건설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직접 발기한 것을 모르는 것 아닙니까?



부부장 : 그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성과를 내겠습니다.



장성택 :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 더 얼마나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백도라지를 취급 하시요.



부부장 : 그건, 좀...



장성택 : 잔말 말고 백도라지를 취급하시오. 단기간에 33호 건설 자금을 마련하자면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장성택은 외교관들에게 코카인 등과 같은 마약을 주면서 외화를 벌도록 부추겼습니다. 이것이 발각되는 날이면 세계적으로 큰 물의가 날 것이 분명하였지만 김정일의 지시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외교관들이 마약에까지 손을 대게 되였습니다. 경험이 없었던 공화국의 외교관들은 처음에는 외교적 특권을 리용하여 주변나라로 마약을 운반하는 방식으로 마약장사를 했고 상당히 재미도 보았습니다. 그 덕분에 33호 건설도 궤도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이 있듯이 마약거래를 하던 공화국의 외교관들이 해외 주재국들의 경찰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터져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하게 되였습니다. 1976년 5월 에짚트의 카이로 세관에서 외교행랑을 통해 헤쉬쉬라는 마약 400kg를 밀수입하다가 적발된 것을 시작으로 그해 10월 북구라파의 노르웨이, 단마르크, 핀란드 주재대사들이 마약을 팔다 잡히는 등 북조선 외교관들의 마약밀매 사건은 전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스웨리예 주재 대사인 길재경이 체포된 사건도 바로 이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부터 공화국은 국제사회에서 마약판매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약밀매 사건은 공화국과 김일성의 대외적 권위를 훼손시킨 반역죄로 몰리여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정치범수용소에 가도 몇 백번을 갈 사안이였습니다. 하지만



김정일 : 나를 위해 고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잘 대해줘야 하겠습니다.



강제추방당한 길재경은 평양에 소환되자마자 당중앙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였습니다. 추방된 다른 외교관들도 모두 1계급 승진이라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 세계로부터 ‘마피아’ ‘마약 밀매 조직’이라는 지탄과 함께 따가운 눈총을 받아 사기가 떨어졌던 외교관들은 김정일의 이러한 고무와 우대에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가 그들을 밀어주는 이상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외교관들은 마약밀매를 하다가 체포되여도 주재국의 법적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붙잡혀도 추방밖에 더 당하겠느냐는 배짱이 생겼고, 설사 추방당한다고 하여도 처벌이 아닌 1계급 특진이라는 영광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추방도 나쁜 일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였습니다. 외교관들은 더 열을 내여 ‘충성의 외화벌이’에 힘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33호 건설자금은 그럭저럭 확보가 되였습니다.



김정일의 피로회복관 건설 즉 33호 건설은 그야말로 극비리에, 김일성도 모르게 진행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시 중심부에 거대한 건물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건물이 무슨 용도로 지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문건설진과 중앙당 국제부, 그리고 외교부에서만이 이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여기에 동원되는 인력도 2개부서에서만 충당하였기 때문에 비밀은 철저히 지켜졌습니다.

1979년 김정일 피로회복관은 준공식만을 며칠 남겨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준공식을 앞두고 외교부와 당 국제부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기일을 맞추기 위해 총동원령이 내려져 연일 3백여 명의 인원이 공사현장에 투입되였습니다. 정해진 기한에 건설을 끝내지 못하면 당성을 의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일에 매달렸습니다. 곧 닥칠 끔찍한 사건을 예견하지 못한 채 준공식 날짜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평양 선물관 화재 사건의 진실>, 두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참고자료: 평양25시(고영환.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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