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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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선물관 화재 사건의 진실 1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김정일은 쪽잠과 줴기밥이야기, 야전리발과 야전식사에 대한 일화 등을 통해, 자신이 인민을 위한 복무의 한생을 바쳐가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삶은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삶이 아니라 안락한 생활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것은 1979년 평양시 보통강구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선물관 화재 사건’이 실증해주고 있다. 인민들에게 혁명적인 근면함을 강요하는 김정일, 하지만 그는 후계자 시절부터 자신의 피로를 회복하겠다며 ‘피로회복관’ 건설을 지시한다. 이 피로회복관은 ‘선물관’이라는 외피를 쓰고 비밀리에 건설되다가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사라진다. <추적 사건과 진실, 평양 선물관 화재 사건의 진실>



1979년 말 평양역에서 서평양쪽으로 운행하는 무궤도 전차가 보통문을 지나 지금의 1고중학교 쪽으로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남1 : 야, 저 건물 지난번에도 불이 붙었었는데 이번에 또 탔구만. 철만이! 저 건물 뭐하는 데야?



남2 : 모르겠어. 무슨 선물관이라고 하던데.



남1 : 선물관? 수령님이 우리 인민들한테 선물주려는 건가?



남2 : 아니겠지 뭐. 외국에서 수령님한테 보낸 선물을 보관하는 데겠지.



남1 : 그런가?



청취자 여러분, 1979년도도 저물어가던 어느 날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 즉 지금의 평양 제1고등중학교 자리에 있던 거대한 4층 건물이 불탄 일을 기억하십니까? 평양에서도 가장 노란 자위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던 이 건물은 인민들 속에서 ‘선물관’으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개관을 몇 시간 앞두고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건물안에는 개관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마지막 작업을 하느라 사람들이 몰려 있어 대참사로 이어졌습니다. 이른바 선물과 화재 사건으로 평양의학대학병원, 정형외과병동은 병실이 모자라서 복도까지 침대를 놓고 그것도 모자라 마다라스를 바닥에 깔고 있을 정도로 환자가 꽉 찼으니 참사의 규모가 짐작이 갈 것입니다. 또한 정형외과 수술을 담당한 의사들이 5일 동안 밤낮을 교대로 환자들의 수술을 집도할 정도였다는 것으로도 선물관 화재 사건의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악으로 전환)



그런데 청취자 여러분, 이 환자들의 대부분은 로동자들이 아닌 외교부 직원들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건설 현장에 외교부 직원들이 동원되였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평양의 한복판에 들어서는 대형 건물이 ‘선물관’이라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게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선물관’화재사건의 감춰져 있는 진실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대답을 하겠습니다.



당내에서 실권을 잡고 온갖 전횡을 다 부리던 1970년대 후반에 김정일은 자기 매제인 장성택에게 자신의 “피로회복관”을 지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피로회복관 하면 아마 평양의 청춘거리에 있는 체육선수들을 위한 피로회복관을 떠올릴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김정일이 요구하는 피로회복관은 체육선수들의 피로를 회복시켜 준다는 피로회복관과는 규모나 시설, 내용 면에서 훨씬 더 요란한 것이였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장성택은 이를 ‘33호 건설’이라는 암호명을 달고 김정일의 피로회복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장성택은 자리를 물색하던 중 보통강 기슭에 있는 풍치 수려한 장소를 발견하였습니다. 봉화진료소와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이 지금의 평양 제1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장성택은 대대적인 개축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장성택은 개축사업을 하면서 기본건설자재인 세멘트와 강재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을 쓰지만 그 외의 자재와 설비는 모두 수입하여 씀으로써 최상의 질을 보장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피로회복관을 멋지게 지어 김정일의 눈에 들여보려는 속셈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값비싼 수입자재를 사올만한 외화가 조선에는 없다는 것이였습니다.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경제무뢰한인 김정일이 경제건설을 하겠다며 무리하게 벌린 ‘70일 전투’ 등의 후과로 국가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지 오래되였고 외화도 역시 고갈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70일 전투는 1971년부터 시작된 6개년계획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이 “당중앙이 당조직을 발동해 제기된 경제난국을 풀어보겠다”며 1974년 10월부터 벌린 사업입니다. ‘혁명적 문화예술을 창조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업적이 없었던 김정일은 단기간에 경제 사업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쌓아 후계자로서의 위상을 세워보려고 했습니다. 김정일은 자신의 집무실을 70일전투 총사령부로 삼고 진행상황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전투를 지휘하는 등의 열정을 보였지만 오로지 성과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국가경제에 대한 장기적인 타산도 없이 자원과 자재, 재정을 무리하게 끌어들였습니다. 70일 전투가 끝나자 북조선 선전기관들은 ‘많은 공장·기업소들이 6개년 계획을 2년 이상 앞당겨 수행하여야 하였다’고 요란하게 선전을 하였고, 김정일은 이듬해인 75년 2월 경제건설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화국 영웅칭호’까지 받았습니다.



70일 전투가 끝난 직후에는 북조선 경제가 어떤 타격을 받았는지 바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몇 달 가지 않아서 강력한 후폭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자재와 재원이 고갈되면서 경제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가상점에 물건이 말라갔으며 상태가 회복될 조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민경제가 악화되어 갔지만 김정일은 각종 우상화 사업에 돈을 쏟아 부었고 200일 전투요 뭐요 하면서 실패가 검증된 속도전식 경제건설을 밀어부쳤습니다.



어찌됐든 경제상황이 점점더 악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장성택으로서도 33호 건설에 필요한 값비싼 수입자재와 설비를 외국에서 들여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고심 끝에 장성택은 이 문제를 김정일에게 적극 제기하기에 이릅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선물관 화재사건의 진실>, 첫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참고자료: 평양25시(고영환.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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