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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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권력장악 비화 - 리명재 부부장 안해 처형 사건 1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김정일의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정일과 그 측근자들이 벌려온 비밀연회다. 이 비밀연회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떠오르던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김정일은 비밀연회를 통해 자신의 심복들을 길러내고 길들이는 한편 충성심을 검열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온갖 란잡하고 비도덕적인 일이 벌어졌던 김정일의 비밀연회, 1979년 이 연회가 발단이 되여 남편이 안해를 권총으로 사살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추적 사건과 진실, 김정일의 권력장악 비화, 리명재 부부장 안해 처형 사건>



청취자 여러분, 1974년 2월1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김정일을 정치위원으로 선출했습니다. 당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사상담당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의 직책을 갖고 있던 김정일은 정치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사실상 후계자의 지위를 확정지였습니다. 당시 김정일의 지위는 굳건해 보였지만 세습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당과 군대, 내각에서의 김정일의 권력지반도 완전히 구축된 것이 아니였습니다. 때문에 김정일은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인 권력승계가 이루어지까지의 6년 동안, 권력핵심에 자신의 인맥을 심는데 전력을 다하는 한편,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이라는 명목 아래 무자비한 숙청을 벌렸습니다.



지금 청취자들 중에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한 이후 그가 주도하던 검열사업이 사회 전역에 몰아치고, 김정일의 후계체제에 저항하는 간부들이 여지없이 지방으로 쫓겨 가거나 사회에서 사라졌던 일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1976년 3월 김정일의 후계세습에 불만을 갖고 있던 남일 부총리가 평안남도 안주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고, 이듬해인 77년 말 김동규 부주석과 류장식 대남사업담당비서가 ‘10대 원칙’에 해독을 끼쳤다는 죄목으로 함경남도 부전골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특히 김동규 등은 1976년 6월 초에 열린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정일의 간부정책과 후계세습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해 무자비한 숙청의 대상자가 되였습니다. 이른바 김동규 사건으로 30만명의 당원이 당에서 추방되였고 60만명의 젊은 당원들이 새로 보충되는 등 로동당에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김정일의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숙청의 바람을 피해 갈 수 없었고 그 결과 정치범들이 대대적으로 늘어나 정치범수용소가 가득 차게 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앞에서 말했듯이 김정일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는 10대 원칙 열 번째 조항에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확립’을 못 박아 놓고 이 조항을 토대로 자신의 후계체제에 반대하거나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철저하게 제거해 나갔습니다.



김정일 : “우리가 열을 하고 싶어도 당에서 하나를 하라고 하면 하나를 하 라!” “하부에서 제기되는 사소한 문제까지도 당 중앙에 보고하고 당 중앙의 비준을 받아 처리하라!”



김정일은 유일적 지도체제를 앞세워 이 같은 지시를 내리면서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보고하는 체계로 전변해 나갔습니다. 비록 김정일이 당을 앞세우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속셈은 김일성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는 것이였습니다.



방송원 : 한평생 조국과 인민을 위해 한 몸 다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제는 편히 쉬셔야 합니다. 그동안 수령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 인민들이 수령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이런 말을 떠들게 한 것도 선전선동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김정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나라의 모든 문건들을 차단시켜 자신에게로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술수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모든 선을 차단하는 한편 그 밑에서 자기의 충실한 심복들을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시켜 나갔습니다. 김정일은 부부장들을 대대적으로 늘려 당 기구를 대폭 확대하는 방법으로 자기사람들을 주요 당기구에 진출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심복들를 길러내고 관리하기 위해 비밀연회를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밀연회에 비교적 ‘부부장급’이 많았던 리유도 김정일이 1970년대 당 내 주요 자리를 자기 사람들로 채우기 위해 이 연회를 리용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에게 있어서 비밀연회는 단순히 먹고 즐기는 모임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길러내고 관리하고 검열하는 중요한 행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어떤 방법으로 이 비밀연회를 활용했으며 연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김정일은 비밀연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지도자 동지의 영광’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또한 비밀연회 참석자라는 것으로 특별한 소속감을 갖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보통 1주일에 2번씩 열리는 연회 때마다 김정일이 직접 참석자 명단을 작성해 서기실로 내려보냅니다. 이 자리의 참석 여부가 김정일의 신임도와 직결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명단에서 빠진 사람들은 ‘김정일이 자신을 더 이상 총애하지 않는 다거나,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보다’는 생각으로 불안을 떨치지 못하게 됩니다. 김정일은 이러한 심리를 증폭시켜 비밀연회에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받아들이게 했는데, 이러한 수법은 김정일이 사람을 장악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또한 김정일은 측근자들에게 비밀연회에서의 일은 절대 입을 다물겠다는 선서를 하게 했는데, 이것은 세상에 공개하기 두려운 온갖 추잡한 일들을 감추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긴 하지만, 김정일의 측근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을 갖게 함으로써 묘한 소속감을 갖게 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이 비밀연회 대상자 중에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하려는 리명재 부부장도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비밀연회에 참석하는 40명 정도의 측근 부부장 중에서도 최익규 부부장, 김용순 부부장 등과 함께 특별히 총애를 받았다는 리명재 부부장, 그는 도대체 어떤 리유로 김정일의 눈 앞에서 자신의 안해를 권총으로 사살했던 것일까요?



추적, 사건과 진실. <김정일의 권력장악 비화, 리명재 부부장 안해 처형 사건> 첫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 자료>

1. 김정일 로열패밀리:P200-202(이한영, 시대정신)

2.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P136-137(황장엽, 월간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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