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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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최고사령관직 찬탈, 그리고 이어진 군부 내의 피바람 8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청취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우리는 ‘김정일이 인민무력부 내 부서에 불과하던 보위국을 보위사령부로, 국방위원회 직속기관으로 만든 리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김정일은 군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보위사령부를 경제난으로 고조되던 인민들의 불만을 통제하는 데도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김정일은 전시체제로 인민들을 통제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서는 군 사법기관의 통치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 나라의 선군(先軍)정치화’를 명목으로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권한을 사회 전반으로 넓혔습니다. 군은 무력부 보위국이 맡고, 민간인은 국가보위부가 담당하던 이전의 분담구조를 허물고 계엄식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민간인도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나서서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위력은 1998년 황해제철소 농성진압에서 그 첫선을 보였습니다.





크르릉



남1 : 이거 뭐야! 총소리 아니야.



여1 : 제철소 쪽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 데요.



남1 : 가만 가만, 땅크 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데. 무기도 없는 사람들한테 땅크까지 동원 해서 뭐하려고 하는 걸까?



보위사령부는 먹을 것을 요구하던 제철소 로동자들을 땅크를 동원하여 사정없이 진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북조선의 공업화를 허물기 위해 파괴 목적으로 설비 및 강철을 사들인 안기부의 고용간첩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고철을 팔았던 로동자 다수가 처단됐습니다.



이뿐이 아니였습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절대권한을 부여받자마자 그동안 국가보위부로부터 렬등한 취급을 당했던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국가보위부 감찰을 시작했습니다. 간부부장을 뇌물혐의로 체포하고 국가보위부 간부들에 대한 협박과 감시를 로골적으로 한 결과 2명의 부부장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살을 반역으로 취급하는 북조선에서 조직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국가보위부의 권능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권력은 김정일의 경호를 맡게 됐다는 점에서도 절대적이였습니다. 1994년 김일성 경호원을 지낸 호위총국 요원이 김정일을 저격한 사건은 북조선의 경호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 치하에서 성장한 경호원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리유로 호위사령부를 믿지 않았고, 국방위원장은 마땅히 군이 경호해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을 제시해 무력부 보위사령부에 경호담당 10처를 신설했습니다. 전 사회적인 감시통제 및 처벌권한과 국가지도자 경호권까지 갖고 있는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그 이름만으로도 북조선 주민을 전률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요체가 곧 무력부 보위사령부였습니다.



그러나 북조선에서는 김정일 독재 외에 그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절대권한을 장기적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총정치국에 소속돼 있는 동안 박해를 받았던 보위사령부 사람들이 김정일이 준 권력을 리용해 앙숙관계의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호소와 울분이 군부 내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보위사령부의 지나친 권력부상과 람용을 우려한 김정일은,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고 보위사령부 내 경호담당 10처를 국방위원회 직속 행사총국으로 분리하고 보위사령부를 다시 총정치국에 예속시켰습니다.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보위사령관 원응히도 ‘동히 사건’으로 불운한 생을 마감합니다. 동히 사건이란 북조선의 이름있는 영화배우 리월숙의 남편이 평양시 만경대구역안전부에 의해 처형된 사건입니다. 보위사령부를 끼고 외화벌이를 해 상당한 돈을 벌어들인 동히는 예심과정에 보위사령관 원응히에게 10만달러를 주었다고 발설했습니다.



당황한 만경대구역안전부는 이 사실을 원응히에게 전달했고 결국 입을 잘못 놀린 동히는 군중 앞에서 ‘황색숙청’이란 명목으로 공개 처형당합니다. 훗날 이 자료를 받아본 김정일은 달러 맛을 안 원응히를 그대로 제 옆에 두지 않았습니다. 원응히는 2003년 보위국장에서 해임됐고 이듬해 간암 진단을 받고는 급사합니다. 그의 사망으로 보위사령부의 절대권력도 서서히 저물어갔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보위사령부가 기세를 떨치던 1992년부터 1997년까지 김정일의 군부 장악을 위해 처형, 숙청, 조사한 사람의 숫자가 무려 1만5000명이 넘습니다. 김정일은 이처럼 피비린내나는 숙청을 통해 군을 장악한 후 이어서 당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김정일의 음모는 1997년 전 농업비서 서관희 간첩사건을 발단으로 사회안전성이 급부상되면서 전국에서 2만5000명이 숙청되는 ‘심화조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김정일은 끊임없이 간첩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사람들을 숙청하고 있습니다. 경제난과 김정일이 수십년동안 벌여왔던 숙청의 악순환 속에서 내부 반발이 큰 위협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북조선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이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내부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주어 반발을 못하게 막고 반대세력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철저히 제거해야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김정일, 그가 간첩사건을 끊임없이 조작해야 하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김정일의 최고사령관직 찬탈, 그리고 이어진 군부 내의 피바람>, 마지막 이야기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 자료: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신동아.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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