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제57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다, 첫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모스끄바에서 나는 려권을 세 개 가지고 있었다. 먼저 76년 모스끄바로 나올 때 김정일이 준 려권인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무려권이다. 소지자는 당연히 본명인 리일남이다. 그 려권은 중간에 한 번 갱신했는데, 이것이 내 공식 려권이다. 김정일에게 보여주는 려권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평양과 모스끄바의 인장만 찍혀있다.

다음에는 소지인이 김영철로 되어 있는 외교관 려권과 김우영으로 돼 있는 또 하나의 공무 려권이 있다. 외교관 려권은 모스끄바유학 시절, 앞서도 말했듯이 권희경 쏘련대사를 통해 만든 려권이다. 이 외교관 려권은 동유럽과 자본주의나라를 려행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세 종류의 려권은 남조선으로 나오면서 안기부 사람에게 주었다. 버리지 않았다면 그 려권들을 안기부가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려행은 주로 겨울방학 또는 4월의 봄방학을 이용했다. 여름방학 때는 평양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보름간의 봄방학이 내 자유시간이었다. 봄방학이 되면 혜림 이모가 돈을 주시면서 오지리 빈에 놀러 갔다오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

이모도 오지리 려행을 자주 하셨고, 또 오지리는 스위스와 함께 조선 인민에게 립국사증을 요구하지 않아 가기도 쉬웠다. 또 빈에는 리상준 련락부 주재원이 있어 체류하기도 편했다.



체스꼬슬로벤스꼬는 모스끄바에서 처음 려행한 곳이라 기억에 남는다. 당시는 체스꼬와 슬로벤스꼬가 분리되기 전이다. 수도인 쁘라하에 갔었는데 깜짝 놀랐다. 모스끄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평양보다 훨씬 자유롭고 물건도 많아서 깜짝 놀랐었는데, 체스꼬에서는 더 놀랐다. 상품도 모스끄바보다 훨씬 많고 다양하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었다. 쁘라하는 사회주의 국가지만 조선과 쏘련만 본 나에게는 화려한 도회지나 마찬가지였다. 쏘련보다 더 발전된 사회주의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제일 발전된 국가가 동독과 체스꼬였다.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모범국이 자본주의로 치면 저 밑바닥이라는 게 증명됐지만 말이다.



해설 : 리일남은 해외 여러 곳을 려행하면서 조선 체제의 모순을 깨닫게 됐다. 57부 부터 이후 이야기를 통해, 리일남이 왜 남조선으로 망명하게 됐는지, 그 리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1월 중순 어머니와 동베를린을 1주일간 려행한 일이 있다. 김정일의 배려에 의한 공식 려행이었다. 우리를 영접하고 안내한 사람은 김정일의 유럽담당 특파원 권형록 부부장이었다. 권 부부장은 독일어를 잘 해 우리를 안내했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따라다녔지만,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 따로 다녔다. 어머니는 박물관이나 음악회에 안내 받아 가시는데, 나는 영화관에 가거나 물건사러 다니는 등 따로 놀러 다녔다. 모자간의 첫 해외려행이었지만, 워낙 취미가 다르니 같이 다닐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아무리 지루했어도 어머니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평상시 제대로 모시지 못하다가 못 모실 상황이 되면 그때서야 효도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게 불효자의 전형이라는데, 내가 바로 그런 불효자였다.



나는 수중에 돈이 모이면 이모가 려행을 떠나거나 평양에 들어가셨을 때 오지리 등지로 놀러갔다. 혼자 가기 심심하니까 학급동무들을 데리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비용은 내 부담이었다.

모스끄바에서도 내 마음대로 행동했지만 그래도 뭔가 제약이 느껴졌는데, 오지리에 가면 완전한 자유였다. 내가 눈치보는 유일한 사람인 이모도 없으니 얼마나 자유스러웠겠는가.

빈에 가면 중앙당 련락부 지도원 리상준이 나와 있었다. 북조선 외교관 등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사관 구내나 특별한 구역에 모여 사는데, 리상준은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 대남공작 등 특수한 임무를 맡은 탓에 따로 사는 것 같았다.

오지리의 유명한 도시 ‘빈’에 가면 리상준 지도원 집에서 생활했다. 리상준의 부인이 해주는 밥을 먹고 자면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놀러 다녔다. 독일어를 못하는 나는 리상준과 함께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는게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1978년 여름에도 오스트리아 빈에 놀러가 리상준 지도원 집에 갔는데, 리상준이 ‘선생’이 와 있다고 말했다. 이름 없이 ‘김선생’이라고만 했는데, 그 사람은 남조선 사람으로 공화국에서 포섭한 공작원이었다. 김 선생은 평양에 들어갔고, 부인과 두 딸만 있다고 했다.





리상준 : 리 선생님, 지금 우리 집에 보안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손님이 와 있습니다.



리일남 : 아, 그래요. 근데 그렇게 중요한 손님이 와 있는데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리상준 : 원래 그 사람이 오면 다른 손님은 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리 선생님이야 일 없습니다. 리 선생님은 꼭대기 층을 쓰시고, 그 사람들은 2층에 있으니 신경쓰지 마십 시오.



리일남 : 그런데 지도원 동무, 부인과 애들은 왜 안 따라 갔답니까?



리상준 : 그게 김선생 부인이 아직까지 확신이 안 선다며 따라갔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꼭 같이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밥은 대개 같이 먹는다. 한 상에서 먹다 보니 대화를 하게 됐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독일에 있는 간호원이라고 했다. 딸 이름은 옥진이, 수진이였다. 리상준의 초대소에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손님이 오면 그저 밥이나 해주는 수준이었다. 내가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애들 선물도 사주고, 중국식당에 가서 외식도 한 번 시켜주었다. 그리고 수영장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나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고, 또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같이 노는 것은 내게도 좋았다.



며칠이 지나자 좀 친해졌다. 부인은 소탈하고 점잖았다. “우리 사회주의 공화국에 오시면 대환영할 텐데 왜 안 가십니까? 가십시오.”라고 했더니, 다음 번부터 가겠다고 대답했다. 대답에 무게가 실린 눈치는 아니었다.



애들에게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 옥진이와 수진이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하는 노래를 불렀다. 오지리에서 남조선 동요 ‘태극기’를 들은 것이다.



한 주일 정도 같이 생활했다가 내가 먼저 떠났다. 잘 있으라고 하니,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김 선생이 평양에서 돌아오면 다시 독일로 갈 예정이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