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으로 가득찬 김정일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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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부 서관희 간첩사건과 룡성사건

죄악으로 가득찬 김정일의 인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11-16 20:04


안녕하십니까? 정민재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김정일의 인생’, 오늘은 김정일이 감행한 “심화조”숙청사건, 그 서막이었던 서관희 간첩사건과 룡성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7년부터 2000년 사이 북조선에서는 수만 명의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몰살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심화조”사건. 그것은 김일성 사망 후 체제불안과 위기를 느낀 김정일이 자기의 권력 강화를 위해 감행한 대학살만행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농업담당비서 서관히에 대한 공개처형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1997년 가을,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평양 통일거리 버스종점에 집결했습니다. 서관히에 대한 공개 처형이 있겠으니 모두가 나와 보라는 당국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서관히 농업담당비서가 평남 숙천군 협동농장관리위원장과 함께 끌려나왔고 이들은 판결문 랑독후 처형당하고 맙니다. 당시 서관히에게 적용된 죄목은 이른바 30년동안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암약하며 당의 농업정책을 깡그리 말아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김정일이 식량난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꾸며낸 날조극이었습니다. 남조선 세종연구소 오경섭연구위원의 말입니다.

“당하고 국가관련 농업담당비서든 농업관련 국가기관에이 잘못해서 현재 식량난이 이렇게 발생한 거다, 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관련간부들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식의 책임회피를 하고 자기 책임을 아랫단이 간부들에게 전가합니다. 그리고 민심을 달래고 지배 엘리트 내부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서 표적을 내세웁니다. 그 표적으로 되었던 게 농업담담비서였던 서관히였습니다. 서관히를 총살시킴으로써 모든 책임을 서관히에게 뒤집어씌우고 ”

당시로 말하면 수많은 인민이 무리로 굶어죽어가던 때였습니다. 김책 시에서만 하루 200여 명의 로동자가 굶어죽어나갔습니다. 인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민심이 심상치 않자 김정일은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그는 사회 안전성에 극비리에 고위간부들에 대한 뒷조사를 지시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농업담당비서 서관히가 비료 30톤을 친인척들에게 장사목적으로 빼돌렸다는 혐의로 사회 안전성에 구속되고 맙니다. 경제사범으로 끌려간 서관히는 어느 순간 남조선 안기부의 간첩, 미제의 고용간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안전성은 사건을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서관히 간첩망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숙천군 협동농장 관리위원장 녀성이 서관히의 조직원으로 둔갑됐습니다. 서관히 사건은 김정일의 의도대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인민들 속에서 식량난 악화의 원인이 남조선 안기부와 간첩들, 그리고 무능한 간부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정일의 음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서관히 사건을 자기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기회로 리용했습니다. 김일성의 사망과 최악의 식량난으로 체제가 동요하자 김정일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간부들에 대한 숙청을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김일성에게 충성했던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조선 동국대학교 김용현 교수의 말입니다.

"책임져야 될 상황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서관희에게 집중이 됐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김정일의 인물들을 심기 위해서는 그런 또 숙청작업이 필요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숙청의 명분이 된 것은 이른바 ‘룡성사건’이였습니다. 6·25전쟁 당시 평양시 룡성에 남조선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가 침투했다는 옛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간첩사건으로 둔갑했습니다. 사회안전성은 서관히가 6.25전쟁 시기 한 달 동안 경력공백이 있었고, 그 한 달간 남조선에서 간첩임무와 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수 십 년간 암약하면서 농사를 망쳐 인민들을 무더기로 굶겨 죽였다고 선전을 했습니다. 사회안전성은 간부들 속에 서관히와 같은 자들이 있다며 대대적인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저기서 간첩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다 남조선으로 탈출한 정광철의 증언입니다.

“피창린이가 조선로동당 부부장까지 했던 사람이고, 그 담에 김지성이가 조선중앙 최고검찰소 초급당 비서에요. 이 사람들이 북한에서 말하면 일시적 후퇴시기 70일간 공백이 있었대요. 이 사람들이 실지로 중국에 있었는데, 그걸 해명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걸 주민등록사건이라고 하는데 룡성구역 안전부에서부터 시작됐어요.”

당시 북조선 당국은 조선중앙 텔레비죤을 통해 련일 룡성간첩사건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간첩 사건의 대상이 대부분 김일성의 측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거나 나이가 들어 집에서 쉬고 있는 로인들까지 잇달아 끌려 나가 총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1984년에 죽어 혁명렬사릉에 묻혀 있던 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김만금의 무덤까지 파헤쳐 공개재판을 한 후 유골에 사격이 가해졌습니다. 중앙당 고위간부로 오랫동안 일하며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피창협은 고문 끝에 자살했고 그 외 많은 고위간부들과 가족들이 그 사건에 련루되어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계속해서 정광철의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 최고위급, 한국으로 말하면 법무부장관, 최고인민회의 법무부장이 잡혀 들어와 있었구요. 안창남, 그 담에 고위급으로서는 조석천이라고, 조석천, 국가안전보위부 철도성 보위부장, 그 담에 량강도 도당 조직비서 김병남, 그 다음 고위급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잡혀 들어와 있었는데, 북한에서 있었던 옛날 심화조 사건이라고 련루됐던 사람들, 안전부장들, 한국으로 말하면 경찰서장들, 한 다섯 명 정도 잡혀 들어와 있었어요.”

김일성에게 충성했던 간부들을 간첩으로 몰아 숙청한 “룡성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의 피바람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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