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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폴란드의 공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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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5-10-08 17:01


폴란드의 역사를 통해 본 북한과 한반도의 미래

- 뽈스까(폴란드) 와르샤와(바르샤바) 국립대 국제관계학 연구소 김규남 박사

   지난 시간에 유럽의 뽈스까 인민들이 근세부터 현대로 넘어오는 시점에 겪은 아픔을 살펴보았습니다. 뽈스까는 123년 동안 이웃나라인 로씨야와 프로씨아,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독립한 지 겨우 21년 만인 1939년 9월 히틀러의 나치 도이췰란드와 스탈린의 쏘베트연방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아 6년의 큰 전쟁 동안 600만 명의 인민을 잃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강제노동소용소와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사람, 모진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숲으로 끌려가 총살되어 암매장 당한 사람들, 쏘련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한 독재자들의 욕심이 자기 나라뿐 아니라 이웃나라에게도 비극을 안겨준 것입니다.

   1945년 5월 나치 도이췰란드가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항복을 했습니다. 유럽의 서쪽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연합군이 해방시켰고, 유럽의 동쪽 땅은 쏘련군에 의해서 해방되었습니다. 뽈스까는 쏘련이 점령을 함으로써 나치 도이췰란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뽈스까의 동쪽 땅은 쏘련이 전쟁 전에 도이췰란드와 비밀협약을 맺고 침공해 이미 빼앗은 곳이므로 뽈스까는 서쪽의 반만 독립한 셈입니다. 쏘련의 스탈린은 뽈스까 인민의 불만을 참작해서 자신이 빼앗은 도이췰란드의 동쪽 땅 일부를 뽈스까 서쪽에 조금 떼어 줍니다. 결국 뽈스까는 전쟁이 끝나고 땅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진 겁니다. 뽈스까의 땅 크기는 8만 제곱킬로미터나 줄었습니다. 스탈린이 빼앗은 뽈스까의 동쪽 땅을 우끄라이나에게 떼어 줬지요. 오늘날 도이췰란드는 전쟁을 반성하며, 스탈린에 의해 빼앗겨 뽈스까 서쪽에 떼어 준 자기 땅을 포기했습니다. 전쟁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으니 죄에 대한 대가로 여기고, 상처받은 이웃나라에게 예전의 땅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뽈스까에게 오늘도 전쟁사과를 하며 배상금을 지불하는 양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거의 잘못을 깨끗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일본도 과거반성을 하지 않아 이웃나라들에게 욕을 먹는 것처럼, 북조선 권력자들도 지금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고문과 학살 범죄를 훗날에 반성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다시 돌아와 뽈스까의 공산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45년 쏘련에 의해서 해방된 뽈스까는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강제 공산화가 됩니다. 쏘련의 스탈린은 자신이 키운 뽈스까의 노동당이 새로운 뽈스까의 정부를 만들도록 도와줬고, 자유민주주의를 바라던 세력들은 투옥되거나 강제로 추방되면서 숙청당했습니다. 공산세력은 1948년 뽈스까 통일노동자당을 만들고, 스탈린이 키워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라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1952년 통일노동자당은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어 뽈스까인민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정치는 인민의 지지를 받고, 인민의 생활양식을 생각하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뽈스까 공산당 정부는 인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정치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대로 뽈스까는 천 년 전에 로마 카톨릭교를 국가의 종교로 받아들이면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오랜 시간 인민의 90% 이상이 로마 카톨릭을 믿고 있었는데, 뽈스까 공산당은 인민의 종교인 로마 카톨릭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오직 공산당만이 유일한 통치기구이고, 쏘련의 스탈린과 당의 권력자들만이 존경을 받아야 하기에 인민의 종교활동을 억압했습니다. 1953년 뽈스까의 교회 최고지도자를 구속하고, 성직자의 1/4을 감금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집단의 분열을 위해 공안기관을 만들어 비밀첩자들의 활동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공산당의 활동에 인민들은 강한 불만을 가졌고, 참지 못한 인민들은 파업과 시위를 통해 정부의 폭압에 도전을 했습니다.

   뽈스까의 대다수 인민들은 공산주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경제활동을 통제하면서 인민의 생활 산업보다 국가를 위한 중공업 산업에만 매진했습니다. 끝내 인민들의 생필품이 부족한 현상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953년 쏘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쏘련의 다음 지도자인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쏘련에 작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뽈스까도 이에 영향을 받았고, 그 동안 참아왔던 인민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뽈스까가 사회주의 헌법으로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지 불과 4년이 지난 1956년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며 대규모로 공장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 사태에서 정부진압으로 70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지만, 이들의 희생으로, 겁을 먹은 뽈스까 당국은 지도자를 바꿨습니다. 당에서 쏘련파가 물러나고 온건한 국내파가 권력을 이끌었습니다. 스탈린 시절에 잡혔던 정치범들이 풀려났고, 작은 평화가 왔습니다. 하지만 인민들의 반란을 잠시 잠재우기 위한 조치일 뿐이지, 쏘련의 통제에 놓인 뽈스까 공산주의 사회는 진정한 자유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1968년 와르샤와 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 지식인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체제에 악영향을 줄거라 판단한 연극공연을 정부당국이 금지시켰고, 이에 인민들이 반발한 겁니다. 자유를 빼앗겼다고 여긴 뽈스까의 지식인들이 시위를 했지만, 수천 명이 잡히거나 추방되었습니다. 이 무렵 체스꼬-슬로벤스꼬의 수도인 쁘라하에서도 자유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쏘련의 땅크에 무차별 진압되었습니다. 1970년 뽈스까의 항구도시 조선소 노동자들이 일당을 충분히 받지 못해 공산당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보름 동안 진행한 시위에서 44명이 죽고, 천 명이 부상당하고, 3천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뽈스까의 공산당 정부는 충격을 받고 또 다시 지도자를 바꿨습니다. 지역 경제발전을 이끈 당 사무총장을 당의 제1서기장으로 뽑았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동 아랍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세계 석유파동의 위기가 왔고, 뽈스까의 경제는 더 안 좋아졌습니다. 경제란 것은 한 나라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라 사이에 무역이 있어야 하고, 자유롭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는 가운데 인민의 살림을 고려하며 나라가 정책을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시장을 닫아 놓고, 인민의 살림도 무시하는 정책은 위기를 더 키울 뿐입니다. 1976년 뽈스까에서 또다시 대규모 파업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직을 만들어 정부에 더 강하게 살림살이를 개선해 달라고 요구했고, 뽈스까 공산당 정부는 또 한번 체제의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뽈스까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초창기부터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인민의 자유를 통제했고, 늘 인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뽈스까 인민은 용감하게 시위와 파업을 통해 처우개선을 요구했고, 자유를 외치며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1980년대 드디어 뽈스까 인민들은 자유를 위해 단합하며 더 큰 시위를 벌였고, 끝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기적의 이야기를 다음 시간에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 청취자를 위해 북한식 표기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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